경주(慶州) 최(崔)부자는 조선 제일의 청부(淸富)다. 18세기 초부터 12대에 걸쳐 300년 가까이 부(富)를 지속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제(고귀한 신분에 따른 도덕적 책무)를 실천해온 집안이다.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거의 유례가 없는 경우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지금도 이 집안에 얽힌 감동적인 일화들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 집안의 오랜 버팀목이 돼온 여섯 가지 가훈이다. 대부분 아는 얘기지만, 우리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일깨우고자 하는 의미에서 다시금 반복해본다. 

재산은 만 석 이상 가지지 마라 흉년에 땅 사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과거는 보되 진사까지만 하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며느리는 시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독립운동가였던 12대 최준 선생(崔浚. 1884-1970)에 이르러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고 가산을 정리, 은밀하게 상해 임시정부에 항일독립운동자금을 보냈던 사실은 듣는 이의 가슴을 숙연하게 만든다. 최준 선생의 이 같은 항일독립활동은 끝내 일제에 발각돼 엄청난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해방 이후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 대구대학을 세우는데 쏟아붓고 청부의 소명을 마쳤지만 그 짙은 감동의 여운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가실 줄을 모른다. 아니 윤리도덕이 실종되고 사람다움을 상실한 오늘 이 혼탁한 세상에서 오히려 더 큰 울림과 가르침으로 우리의 뒤통수를 내려치고 있다.   

  하지만 경주 최부자의 창업주가 최국선(崔國璿)이며, 그 청부정신은 최국선의 할아버지인 최진립 장군(崔震立.1568-1636)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다. 경주•울산 전투에서 왜적을 격파, 경주와 언양(彥陽) 등 그 일대를 지켜내는 큰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도 여전히 조선군의 장수로 주변의 만류를 뿌리친 채 노구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 청나라 오랑캐와 싸우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만고(萬古)의 충신이다. 임진왜란 때 혁혁한 무공을 세운 조선의 장수 가운데 병자호란에도 제일 먼저 달려나가 싸우다 전사한 장수로는 아마도 공이 유일할 것이다.

  1636년 12월(이하 음력) 청나라 대군이 조선을 침공해왔을 때 최공은 공주(公州) 영장(營將)이었다. 이 때 그의 나이 69세. 스물일곱살에 무과에 급제하고도 13년 뒤에나 벼슬길에 나가 경원(慶源)•경흥(慶興)부사, 전라수사, 공조참판겸 도총부 부총관, 경기수사, 경기•충청•황해 3도 수군통어사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뒤였다.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신한 인조는 전국 팔도에 근왕(勤王.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함)령을 내렸다.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는 군사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정세규는 기축옥사(1589년)를 촉발한 정여립(鄭汝立)모반사건에 연루돼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충신 정언신(鄭彦信)의 손자다. 정 감사는 공이 연로함을 염려한 나머지 군영에 남도록 권유했으나 공은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그리고는 비분강개한 어조로 "내 비록 근력은 노쇠했지만, 마음은 전장에서 싸우다 죽는데 있다. 늙은 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수 없겠는가?(筋力雖衰,志在裹革,老者獨不能一死報國哉)"라며 갑옷을 갖춰 입고 칼을 차고 활을 멘 채 말안장에 올라 앞으로 나아갔다. 

정 감사를 비롯한 모든 장졸들이 감격한 나머지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을 따랐다. 정감사가 이끄는 부대가 남한산성과 불과 30리 가량 떨어진 용인(龍仁) 험천(險川.수지 머내)에 이르러 부대를 좌우로 나눠 공은 전면에  자리잡고 정 감사는 뒤에서 적을 기다렸다.  청나라 군이 야음을 틈 타 후위에 있던 병력까지 합세해 대군을 휘몰아 세차게 공격하자 아군의 선봉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질풍노도같은 청나라 철기병들의 공세에 조선군은 새파랗게 질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장군은 비명과 함성이 교차하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동요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 자리에 우뚝히 서서 적을 향해 계속 활시위를 당겼다. 장군의 손을 떠난 화살들은 여지없이 적을 명중시켰다.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며 용맹을 떨치고 이미 두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 장군이었다. 화살이 떨어지고 적의 칼날이 조여오자 장군은 칼을 빼어들고 숙연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젊은 장수들과 시종들에게 서둘러 피할 것을 재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나를 따라 죽을 필요가 없다. 나는 여기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그리 알라(爾等不必從我死,我則不離此一寸而死,爾其識)." 

적이 물러간 뒤 공의 여러 아들들과 공을 따랐던 아전들이 바로 그 곳에서 공의 시신을 거뒀다. 공의 몸에는 수십 군데의 칼자국과 함께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으나 얼굴만은 살아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옆에는 평소 장군을 그림자처럼 따랐던 노복 기별과 옥동의 시신도 함께 있었다. 빨리 피하라는 장군의 명령도 거부한 채 오랑캐에 맞서 싸우며 마지막 순간까지 장군을 지키려 했던 충성스런 노복들이었다. 경주 최부자 집안에서는 해마다 12월 27일 장군의 제삿날엔 이들 두 노복의 제사도 함께 지내 그 충심을 잊지않고 있다고 한다.

이 일이 조정에 전해지자 인조는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몹시 슬퍼했다. 유사(有司.관계자)에게 일러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고 공에게 병조판서를 추증했다. 또 경상감사에게 명해 공의 장례를 잘 보살펴 거행케 했다. 

정묘호란(1627.인조5년)때 병조판서와 도원수로 전란을 잘 수습했던 판중추부사 김시양(金時讓.1581-1643)은 이런 장군을 두고 "병자호란 때 충절을 세운 것으로는 최진립이 으뜸(丙難之立節, 震立爲最)"이라고 칭송했다.

  공은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5세의 젊은 나이로 의병장이 돼 수천의 의병을 이끌고 고향인 경주와 언양 일대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정유재란 때도 의병으로 구성된 결사대 수백명을 이끌고 울산 서생포(西生浦)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왜적 수백명을 주살하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때 적이 쏜 조총에 배꼽 밑을 맞았으나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승리한 강골이다. 이 해 겨울 경주 부윤 박의장(朴毅長) 휘하 장수로 명(明)나라 경략 양호(楊鎬)와 원수 권율(權慄)장군이 지휘하는 울산 도산(島山)전투에 참전, 적진으로 돌진하다가 왜적이 쏜 총탄이 오른쪽 얼굴을 뚫고 왼쪽 뺨에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뼈를 긁어내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면서 총탄을 빼냈는데도 공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더욱 기세가 등등해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혀를 내두르며 탄복했다고 한다. 울산 전투는 특히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데 톡톡히 기여한 아군의 가공할 시한폭탄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처음으로 선을 보인 전장이었다. 

공은 경주와 울산 전투에서 세운 전공을 모두 부하들의 몫으로 돌렸지만, 훗날 암행어사의 장계 등으로 그 눈부신 활약상이 드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지 7년 뒤인 1605년(선조38년) 2등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된다.

  장군은 1607년(선조40년) 도총부 도사로 처음 관직에 나간 이래 변방의 수령이나 장수로 늘 외직에 있으면서 타고난 부지런함과 강직함, 청렴함과 용맹으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과 군사를 보살피는데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전답과 둔전을 개간, 전화(戰禍)로 찌든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살찌우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부역과 세금을 깎아주고 교육과 미풍양속을 장려하는가 하면, 군사들을 조련시키고 군비를 확충,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국방을 튼튼히 해 인조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고, 늘 넉넉한 도량으로 군사들을 자식같이 대해 부하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수령칠사(守令七事)라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 지방 수령의 복무지침이다. 지방 수령으로 나가는 자는 임지로 떠나기 전 대전에 나가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하면서 직급에 상관없이 임금 앞에서 ’수령칠사’를 큰 소리로 낭송해야 했다. 임금을 대신해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고을을 다스리는 사또의 책무가 지엄함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땅의 공직자들과 국민 모두 들으라고 여기서도 한 번 크게 외쳐보자. 

농업과 양잠을 흥성케 하고(農桑盛) 가옥과 인구를 늘리며(戶口增) 학교를 일으키고(學校興) 군정(軍政)을 다스리며(軍政修) 세금과 부역을 고르게 하고(賦役均) 소송을 줄이고 간소화하며(詞訟簡) 간사하고 교활한 풍조를 종식시킨다(姦猾息).

오늘날에 견줘 봐도 명칭만 약간 다를 뿐, 본질은 변한 게 없는, 하나같이 중요한 국가 현안들이다. 지방 수령뿐이 아니라 나라의 최고 지도자도 이 일들만 제대로 해내도 훌륭한 정치가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공은 이 막중한 책무를 성실히 수행한 모범적인 목민관이자 덕장(德將)이었다. 그런 까닭에 40세의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나갔지만 가는 곳마다 덕성스런 인품과 뛰어난 업무 수행, 그리고 청근(淸勤)함으로 암행어사와 도백, 조정 중신들로부터도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이런 찬사  중에서도 두 가지가 압권이다. 마량(馬梁)첨사 때의 일이다. 임진왜란 뒤끝이라 백성들의 삶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궁핍했다. 공은 실의와 절망에 빠진 백성들을 다독이고 북돋워 피폐한 살림살이를 일으켜 세우는가 하면  군사조련과 함께 무너진 성을 수축하고 군비를 보강하는 등 군정에도 빈 틈이 없었다. 이런 그의 치적이 크게 알려지자 당시 충청도 관찰사는 비인(庇仁)현감 박유충(朴由忠)을 검열관으로 보내 사실 여부를 점검했다. 박유충은 공의 높은 덕(德)과 업적이 뛰어남에 감복한 나머지 검열기록인 <안문기(按問記)>까지 지어 공을 칭송했다. 

"진실로 청렴한 것과 억지로 청렴하려고 하는 것, 그리고 청렴한 척 속이는 것 등의 말이 있다. 생각컨대 억지로 청렴하려고 하는 것과 청렴한 척 속이는 것은 세상을 기만하는 것이요, 진실로 청렴한 것은 공이 이에 해당한다(有眞淸强淸詐淸等語,蓋以强詐譏世而以眞歸公也)"  

또 한 번은 공이 경흥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자 순변사 우치적(禹致績)이 포상을 청하는 장계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함경감사 이명(李溟)으로 하여금 철저히 조사해 보고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이 감사의 장계가 또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극찬이다. 곧 "관직에 있으면서 승려처럼 고행하듯 절제하고 있어 숭상할 만하다(居官如僧苦節可尙)"고 했으니, 이보다 더 한 찬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조선 500년을 통틀어 최고의 헌사(獻辭)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명은 두 차례나 전란을 겪으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청나라에 엄청난 재물을 뜯기면서도 국고를 튼튼히했던, 조선 최고의 호조판서로 불리는 명판(名判)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경원부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경성(鏡城)을 지나게 됐다. 이곳 판관 이윤우(李潤雨)는 사대부 출신으로 평소 공과 친하게 지냈다. 공을 전송하기 위해 술상을 차리고 이름난 기생까지 들여 며칠간 공을 시중들게 했다. 공은 끝내 이 어여쁜 기생을 외면했다. 이 판관은 크게 감탄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마음 굳센 남자를 보았다. 악무목(岳武穆.중국 南宋의 장군 岳飛)인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이처럼 사방에서 칭찬이 이어지자 인조도 몹시 흐뭇해하며 공을 전라수사에 기용했다가 곧바로 공조참판 겸 도총부 부총관에 전격 임명했다. 파격이었다. 공이 놀라 글을 올려 고사하자 인조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진심이 담긴 비답(批答.임금이 신하에게 답하는 것)을 내린다. 

"계해년(인조반정을 지칭) 이후 나라 안이 모두 마음과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 등 (제 살 길 찾기로) 이미 오염이 깊어진 마당에 유독 공만이 청렴함과 질박함으로 나의 백성들을 사랑하니 내가 이를 심히 가상히 여겨 아경(亞卿.참판)의 직임을 제수한 것이다. 경은 실로 이에 합당하니 사양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라."

공은 두렵고 놀란 마음으로 더욱 힘써 사양했지만, 인조의 아낌이 더욱 깊어져 4개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사직을 허락했다. 그 해 겨울에 또 특별히 경기수사에 제수해 공이 부임에 앞서 하직인사를 올리기 위해 대전으로 가자 인조는 공을 불러 "청렴하고 질박한 경을 얻어 곤수(閫帥.병사와 수사를 이르는 말)로 삼았으니 나는 아무 근심이 없다"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냈다. 공이 임기를 마치자 경기 수영이 있는 교동(喬桐.강화도)의 연로한 백성들이 조정에 글을 올려 공을 유임시켜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인조는 이를 흔쾌히 승락하면서 공에게 경기•황해•충청 3도의 수군통어사까지 겸직케 했으니, 의심 많은 인조가 장군을 얼마나 믿었는지를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공이 또 여러 차례 글을 올려 마다하자 인조는 엄숙한 유시를 내린다. 

"나는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오직 청렴하고 근면한 사람만을 서용한다.(予不肩好貨,唯廉勤敍欽)"   

  예로부터 '왕대밭에 왕대난다'고 했던가. 장군은 늘 한결같이 올곧으면서도 덕이 높았고, 충성스러우면서도 넉넉했으며, 부지런하면서도 물욕과 사심이 없었다. 감히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장군의 이 같은 품성은 청부의 창업주인 손주 최국선에게 그대로 유전됐다. 할아버지를 쏙 빼닮은 국선이 이런 성품과 노력으로 기울어진 집안을 일으켰으니, 깨끗한 부자가 되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공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두 차례나 큰 전쟁에 나가 나라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으니 하늘인들 무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이 죽고 14년이 지난 1650년(효종1년)에 공의 부장이었던 김우적(金禹績)의 상소로 공에게 정무(貞武)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청백리로도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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