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관식에서 오랜만에 본 조카는 불편한 모습이었다. 갑작스런 고통의 순간이었기에 저러한가 또 가슴이 찢어졌고, 다시 보니 근심 어린 표정이기도 하고 평안한 인상이기도 하였다. 이별의 말도 그 기미조차 없었던 남편을 원망하는 한탄을 할 수도 있겠는데 질부는 거듭 미안하다고 오열하였다. 직장과 집으로 서로 다른 공간에 있어 도저히 가능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응급조치해주지 못한 통한. 조카의 희망인 어린 두 상주는 의연하게 절차를 따랐다. 참척(慘慽)의 슬픔에 혼곤하다가 가족들에게 나에게 빈소에서 대기하는 친척과 지인들에게, 특히 말없는 조카, 병세를 알리고 ‘잘 처신하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라고 오히려 위로하던 조카에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순서가 다를 뿐. 우리 모두 결국 이런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는 존재 아니더냐. 다만 네가 앞서서 원통하다. 아니다. 큰 차이 없다.’

 황망히 화장을 하고 장례식을 마쳤다. 지난 사흘과 조카의 부재가 현실 같지 않았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존재의 무상을 직시하고 위무하는 불가의 선시를 떠올리며 의지하였다. “人生一片浮雲起(인생일편부운기 : 인생은 한 조각 구름이 떠올랐다가) 人生一片浮雲滅(인생일편부운멸 : 그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네)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 뜬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고) 생야거래역여연(生也去來亦如然 : 사람이 사바에 오고 가는 것도 그런 것)”이 떠오르며 공감하였다. 삶의 허무를 일깨우며 모든 집착과 탐진치(貪瞋痴)에서 벗어나 해탈의 대 자유를 누리라는 그 깊은 뜻을 새기다가 다음 시를 읽게 되었다. 

 보소서! 금속의 뜨거운 화염 속으로 한 아이가 떨어졌나이다. 황금이 들끓는 용광로라 한들 무엇이 달라졌겠나이까? 꿈은 때때로 검은 재가 되기도 한다 한들 그것이 푸른 나무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나이까? 금속의 뜨거운 쇳물 속으로 한 아이가 떨어졌나이다. 기름 속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이 튀어 오르는 순간처럼, 그가 보았을 마지막 풍경이 날카롭게 우리의 심장을 찌르나이다. 황금이 들끓는 용광로라 한들 누가 그를 황홀이라 이름 하겠나이까? 우리의 노래는 노래가 되지 못하고, 통곡은 입술에서부터 불타오르나이다. … …

                                  - 「황금이 들끓는 용광로에 당신의 어린 양이」 일부/노태맹

 체념과 더불어 가슴에 가라앉던 슬픔을 이 시가 다시 앙연히 치솟게 하였다. 절대자에게 부복하되 순명(順命)을 거부하는 화자의 기세와 항의. 아무리 죽음을 ‘황금의 들끓는 용광로라 한들’, ‘꿈은 때때로 검은 재가 되기도 한다 한들’, -아무리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도대체 생명의 ‘푸른 나무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나이까?’ 아무래도 가슴에서 다 타지 않았던 미진한 억울한 심정에 저미듯 부합하였다. 그렇다, ‘그가 보았을 마지막 풍경이 날카롭게 우리의 심장을 찌르나이다’!!

 이 시는 흐릿하기도 하였던 유족의 애절한 심정을 명료하게 대변해준다. 슬픔을 슬픔답게 하고 슬픔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게 한다. 좋은 시는 이렇듯 우리들의 희노애락애오욕 칠정(七情)을 보다 진솔하게 음미하게 하여 카타르시스, 감정을 정화(淨化)하게 한다. 시인들은 그러니까 휴머니스트이고, 시는 그 언어이다. 이 시의 다음 대목을 더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를 우리 앞에 현현(顯現)케 해 주소서.

완벽하게 사라진 죽음을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하니

그를 우리의 이 노래로 이별케 해 주소서.

그를 우리 앞에 현현케 해 주소서.

불의 몫이 아닌 물과 공기의 몫만이라도 와서

그와 우리의 이 물 노래로 이별하게 해 주소서.

… …

 침착하게 격동하게 하는 이 시를 거듭 읽었다. 그러고 나서 ‘人生一片浮雲起 人生一片浮雲滅’을 묵상하였다. 지진으로 갑자기 가족을 잃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겪는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유족들께도 두 시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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