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은 무엇에 관심을 가질까? 

삶의 가치와 목표에 따라 그 기준이 다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행복과 장수(長壽)만큼 큰 관심사도 없을 것이다.

근년들어 교육 및 생활 수준의 향상과 현대 의학의 발달로 우리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높아지고 수명도 늘어난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100세 이상 살기는 여전히 어렵다. 우리 주변에는 120세까지 살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아직까진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107세까지 산 노인이 있었다. 영조 26년(1750)에 태어나 정조•순조•헌종시대를 거쳐 철종 7년(1856)까지 살았던 이수천(李壽天)이란 사람이 그 주인공이다. 지금도 위태롭게나마 경로사상이 남아 있지만, 조선시대엔 ’귀로(貴老:.노인을 높이고 귀하게 여김)’라고 해서 노인들을 극진히 섬겼다. 강상(綱常)의 법도가 엄연하던 유교사회인데다 대다수 백성들이 단명했던 사회적 풍조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물질적 풍요가 장수를 가로막고 있지만 그때는 가난과 질병이 단명을 부채질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이옹은 백세를 훌쩍 넘겨 나라의 최장수 어른이 됐으니, 임금의 대접이 융숭할 수밖에. 쌀과 비단, 보옥은 물론이고 90세가 넘으면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벼슬까지 내려졌다. 통정대부는 벼슬의 품계로 따져 정3품에 해당하는 높은 직급이다. 실제 직책이 주어지지 않는 명예직이지만,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대단한 가문의 영광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만 백 세가 되면 재상급 반열인 숭정대부(崇政大夫.종1품)에 올랐다. 

이옹은 연치로 보아 통정대부와 숭정대부를 거쳐 최고의 품계인 숭록대부(崇祿大夫)의 직첩 (임명장)까지 받았을 것이다. 나라에서 가장 오래 산 덕분에 재상급의 벼슬까지 했으니 엄청난 홍복이다. 이는 아무나 욕심낸다고 되는 게 아니고 천운을 타고나야 가능한 일이다. 요즘 아무리 의술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120세까지 살겠다고 의욕을 보이는 분들께서는 한 번 참고해보시라.

고종때 영의정을 지낸 조선말의 문장가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1814-1888)선생도 이옹을 위해  ’백칠세 노인 묘갈명(百七歲老人墓碣銘)’을 써줬으니 죽어서까지 경사가 겹쳤다.

이유원은 바로 일제 강점기인 1919년 전 재산을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와 교육시설인 경학사를 세워 치열하게 항일독립투쟁을 벌였던 이석영(李石榮)선생의 부친이다.

그의 문집인 [가오고략(嘉梧藳略)]에 실려 있는 이 묘비명엔 이옹에 관한 기록들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요지는 이렇다.

"호남의 시산(詩山 : .지금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엔 107세 노인이 있다. 그의 6대조와 5대조, 그리고 고조는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 때 적군과 싸우다  순국했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출중하고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등 성격이 낙천적이다. 또 곡식심기를 즐겨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복을 심는 징조라고 했다. 장성해서는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실천하고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사람을 대함에 언제나 솔직하고 진실해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우러르고 대표로 내세웠다. 세 번 장가를 들어 옆에서 시중드는 자손만도 30여 명에 이른다."

이를 보면 장수의 비결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는 듯하다. 예컨대 ▲낙천적 성격 ▲근면성실 ▲절제 ▲사교성 ▲화목한 가정 등이 그것이다. 여러 번 장가 가는 건 물론 이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귤산은 끝으로 이옹의 묘지명을 쓴 이유를 이렇게  요약했다.

"사람의 수명은 어진 사람이나 보통사람이나 모두 자신의 수명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공(이옹)의 수명은 큰 장수로 보통사람의 장수가 아니다. 그래서 장수로 벼슬이 숭정의 반열에 올랐고 또한 글로 전함도 오래가는 것이다(至人之壽 仁人之壽 庶人之壽 皆壽其壽 公壽大壽 非凡民壽 爵崇以壽 文傳亦壽)."

이 말은 결국 ’조정이 노인을 공경하면 백성이 효를 일으킨다(朝廷敬老则民作孝)’는 공자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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