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의 봄 풍경. (사진=수원시포토뱅크 강제원)
광교산의 봄 풍경. (사진=수원시포토뱅크 강제원)

우리들이 ‘큰 형님’으로 모시는 홍기헌 경기도언론인장학회 이사장님은 MBC 기자로 언론계에 첫 발을 디딘 이래 경기일보 대표이사 사장, ㈔경기언론인클럽 초대 이사장을 거쳐 수원시의회 의장, ㈔경기다문화사랑연합 이사장, 경기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한 지역사회의 어른이다.

꽤 오래 전에는 ‘2만회’라는 모임도 함께 했다. 모일 때마다 술값 2만원을 지참하면 되기에 붙은 명칭이다. 지역의 문인과 언론인, 역사학자, 사업가, 시의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큰형님을 중심으로 모여 자주 노변정담(爐邊情談)을 나누었다. 큰 형님은 ‘사단법인 광교산’이라는 단체도 만들어 이끌었다. 초창기엔 나도 끼어들어 활동했다.

그 때 흰머리를 휘날리며 산행을 하는 나를 보고 큰 형님은 “저 사람은 광교산 산신령이야”라고 말했다. 과분한 호칭이었지만 은근히 기분이 좋아 가끔씩 술자리에서 큰 형님이 나를 그렇게 불렀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그 ‘광교산 산신령’이 지난 번 광교산 산행에서 길을 잃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산길을 걷는데 낯선 풍경이 나타났다. “아차 길을 잘못 들었구나”라면서 온 길을 되짚어 가려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냥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래봤자 의왕이나 성남이겠지. 설마 수원으로 가는 차가 없으려고. 없으면 또 걸으면 된다.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을 한참 가니 과연 의왕시임을 알리는 표시판들이 눈에 띈다. 한가로운 전원풍경도 나온다. 좋다. 다시 마음이 편해진다.

백운사 입구에서 길을 물으니 수원 가는 버스가 있는 1번국도 까지는 4km정도란다. 까짓거 10리 길이니 걷자. 왕곡천을 따라 느릿느릿 걷다보니 충무아파트가 나오고 1번 국도가 보였다.

여기서 65번 버스를 타고 수원으로 돌아와 팔달문에서 내렸다. 단골 백반집에서 밥과 반찬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며 생각해보니 의문이 생긴다.

‘광교산 산신령’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광교산 곳곳을 잘 알고 있는 내가 어째서 길을 잘못 들었을까? 아무리 오랜만에 갔다고 꿈속에서조차 훤한 그 길을 뭣에 홀린 것처럼...

아, 그러고 보니 산 초입에 들어설 때부터 내 생각과 신체의 회로가 뒤죽박죽 돼버린 것 같았다. 이 날은 지난여름 홍수에 망가졌다는 통신대 헬기장 등산로를 가보려고 나선 길이었다. 13번 버스 종점에서 왼쪽 절집 옆으로 가면 통신대 헬기장으로 향하는 길이다.

얼마 전 아내가 보여준 사진 그대로였다. 흡사 큰 지진이 난 듯, 엄청난 폭격을 받은 듯 처참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견고하게 포장돼있던 길은 사람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도로는 뒤집어져 하천이 됐고 남아 있는 길 위엔 거짓말 조금 보태 집채만한 바위가 올라앉아 있었다. 과연 이게 도로였던 게 맞나? 문득 요한의 묵시록에 나타난 종말, 대재앙이 이렇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작게 몸을 떨었다.

길이 이렇게 망가진 사실을 모른 채 산악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던 사람의 얼굴도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폭우피해를 입은 광교산 통신대 헬기장 가는 도로. 아스팔트 도로가 뒤집어져 있다.  (사진=김우영 필자)
폭우피해를 입은 광교산 통신대 헬기장 가는 도로. 아스팔트 도로가 뒤집어져 있다.  (사진=김우영 필자)
폭우피해를 입은 광교산 통신대 헬기장 가는 도로. 돌과 바위덩이가 나뒹굴고 있다. (사진=김우영 필자)
폭우피해를 입은 광교산 통신대 헬기장 가는 도로. 돌과 바위덩이가 나뒹굴고 있다. (사진=김우영 필자)
폭우피해를 입은 광교산 통신대 헬기장 가는 도로가 파헤쳐진채 방치되고 있어 도로를 무색케 하고 있다. . (사진=김우영 필자)
폭우피해를 입은 광교산 통신대 헬기장 가는 도로가 파헤쳐진채 방치되고 있어 도로를 무색케 하고 있다. . (사진=김우영 필자)

올라가는 길은 거의 1km 정도나 파괴돼 있었다. 과연 복구가 가능하기는 한 걸까 하는 걱정을 하며 간신히 통신대 헬기장에 올라섰다.

얼마 전 본 기사가 생각났다.

지난해 8월 집중호우 때 수원지역내 미 군사도로가 완전히 유실됐지만 7개월 넘게 복구가 안 돼 문제가 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폐허가 된 군사도로는 미군기지내에서 필요한 군사용 지원 물품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생활물품 등 기지 내에서 사용되는 물품들을 지원해 주는 도로다. 폐허가 된 채 차량통행이 완전 끊긴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메디슨부대측은 헬기를 이용해 군수 및 생활물품들을 공수받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제는 지금은 비상상황이 아니라 긴급처방으로 대처하고 있지만 비상시나 전시상황이 닥쳤을 경우 ‘비상상황’에 대처하기가 어렵다는데 있다’고 한 언론사 후배는 걱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도로가 미군의 군사도로여서 도로보수 등 행정적인 뒷받침은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미8군 측에서도 이 같은 상황을 인지, 예산을 확보하는 대로 공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랬던 것 같다. 물길이 바뀔 정도로 피해를 입어 산의 정기가 훼손됐으니 그 처참한 현장을 본 나의 혼백도 놀랐을 것이다. 그날 길을 잘못 든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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