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력과 경제처럼 우리 시도 지난 100여 년 여러 굴곡과 논란을 거치면서도 맹렬하게 질주해와 오늘날 그야말로 울창한 숲을 이룩하였다. 1910년대 이래 서구의 문예사조와 시론도 수용해 우리 삶의 형이상 형이하 형상화에 활용하며 언제인지 모르게 근대 콤플렉스도 지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1960년대부터는 잠시 소홀하였던 20세기 이전의 시조와 가사를 조명하고 우리 선인(先人)들이 이 땅 삶의 애환과 소망을 다룬 한시(漢詩)와 시화(詩話)도 대거 국역해 감상과 창작의 자양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통은 과거 기억의 박제된 유산이 아니라 현재 가치 창출을 촉진하고 강화하는 자산이자 지혜이다.  

 전통 시론에서 공자(B.C. 551 ~ B.C. 479)의 견해는 그 원류라고 하겠다. 500년 조선 학인들이 거의 암송하다시피 한 『논어』에서도, “사람이 『시경』의 《주남》 《소남》을 읽지 않는다면, 마치 담벼락을 마주한 듯 답답하리라(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 등등, 시를 인간의 필수 소통교양으로 애호(愛好)하고 상찬(賞讚)하는 공자의 언급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압권은,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시경』의] 시 305편을 한마디로 개괄하면, ‘생각에 악(惡)이 없다’)”일 것이다. 시가 인성(人性)의 진정(眞情)[(성선(性善))에서 우러나온 긍정의 표출이라는 이 기본 관점은 이후 공자의 권위와 더불어 『시경』 뿐만 아니라 모든 시를 포괄하는 최고의 시 옹호론으로 자주 소환되며 별 이의 없다. 

 그런데 모든 언급이 그렇듯 공자의 그 표명에도 오래 관심을 끄는 애매한 국면이 있다. ‘생각에 악(惡)이 없다’에서, ‘생각’이 누구의 생각인지. 시인, 작중 화자(話者), 작중 대상 인물일 수 있다. 작품의 사정에 따라 다르고 서로 얽혀있기도 하여 그 개괄에서 오히려 생략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생각’이 인물의 생각만이 아니라 작품의 주제나 어떤 내용일 수도 있어 아무래도 좀 아쉽다.   

 그런데 이미 『시경』 학자들이 밝힌 대로 ‘사무사(思無邪)’는 『시경』 《노송(魯頌)》의 시 「경(駉)」의 7행에서 등장한다.  

 駉駉牡馬(경경모마) 통통하게 살찐 숫말들 

 在埛之野(재경지야) 먼 들판에 있습니다 

 薄言駉者(박언경자) 저 숫말들을 말할 것 같으면

 有駰有騢(유인유하) 잡색 말도 있고 불그레한 말도 있습니다 

 有驔有魚(유담유어) 정강이 흰 말도 있고 눈이 흰 말도 있습니다

 以車祛祛(이거거거) 수레를 몰게 하니 씩씩한 그 모습 정말 멋져요

 思無邪(사무사)     나쁜 기운 없으니 

 思馬邪徂(사마사조) 저 말들 멀리 멀리 잘 달릴 겁니다

                                                   -유병례 역 

 역자는 해설에서, ‘사(思)’는 ‘생각’이 아니라, “아무런 뜻이 없는 ‘발어사(發語辭)’”이며, “‘무사(無邪)’는 ‘나쁘지 않다’, ‘좋다’, 그런 뜻입니다. ‘邪’에 ‘천천히’라는 뜻도 있으므로 ‘느리지 않다’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지요. 이 경우 ‘말이 빨리 달린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라고 하였다. 이 시의 문맥으로 보아서도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자의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를 기존과는 달리 원전 「경(駉)」의 맥락에 따라 새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시 305편을 한마디로 개괄하면, -시 305편은, 「경(駉)」의 말(馬)들처럼- 나쁜 기운이 없다”라고. 다시 말해 『논어』에서 공자가 언급한 ‘思無邪’가 「경(駉)」에 근거를 둔 ‘인유(引喩)’라면, 그 뜻은 ‘생각에 악(惡)이 없다’가 아니라 ‘나쁜 기운이 없다’이며, 그 둘째 절에서 생략된 주어 ‘시 305편’을 설정하고, 역시 생략된 ‘「경(駉)」의 말(馬)들처럼’이란 부사어를 복원하면, 온전한 절서술어 술어(述語)가 되어, 문장을 명제로 성립시킨다. 

 따라서 ‘思無邪(나쁜 기운이 없다)’는 시 자체에 직결되며, 작품의 사정에 따라 그 구체를 따져야 할 것이다.(작중 화자나 대상 인물의 생각이나 정서, 판단과 소망, 혹은 전체 주제나 어떤 내용 등’). 시를 짓는 시인의 인격과는 간접 연결된다.    

 공자는 인심과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자신이 정성들여 선별한 시 305편을 ‘자태와 심성이 아름답고 멋지며 멀리 잘 달리는 말들’로 은연 중 비유하였다. 정신장애와 신체장애 치유에 기여하는 ‘재활승마’가 상기된다. 정서 순화와 심리 안정. 그런데 정신장애, 알고 보니,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우울증, 약물남용, 학교부적응, 분노조절 저하, 청소년 비행, 언어와 문화의 차이[다문화]에 기인한 갈등 등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아무리 ‘재활승마’까지 활성화한다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는 그것들에 못지않게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치맛자락에 휩싸이거나 두르고서 편견과 증오를 앓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정서 순화와 심리 안정? 아니 이건, 그 무엇보다도 시가 가장 잘 또 쉽게 하는 일 아닌가? 

 독자 여러분, 혹 주변에 여러 까닭으로 갈등에 매여 우울해하거나 자신과 타인에게 기분 나빠하는 이웃들이 있다면, 지하철 스크린도어의 시나 우리 주위에 산재한 시집의 시를 하루 한 편 읽어보라고 권유하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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