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사발실크로드의 원정 전시가 지난해 튀르키예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 부르사에서 몇달동안 열렸다.

세계 하제테페(앙카라) 막사발 실크로드 심포지엄(2011~2022)에서 제작된 도조 컬렉션 작품이 부르사에 있는  토파슈 아나톨리언 자동차 박물관에 초대 전시됐다. 

(Tofaş Bursa Anatolian Cars Museum/ Hacettepe University MACSABAL SILKROAD WORKS)

부르사 토파슈 자동차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막사발 실크로드 작품1.
부르사 토파슈 자동차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막사발 실크로드 작품1.
부르사 토파슈 자동차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막사발 실크로드 작품2.
부르사 토파슈 자동차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막사발 실크로드 작품2.
부르사 토파슈 자동차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막사발 실크로드 작품3.
부르사 토파슈 자동차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막사발 실크로드 작품3.
부르사 토파슈 자동차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막사발 실크로드 작품4.
부르사 토파슈 자동차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막사발 실크로드 작품4.
부르사 토파슈 자동차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막사발 실크로드 작품5.
부르사 토파슈 자동차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막사발 실크로드 작품5.

아래 글은 튀르키예 하제테페 국립대학교 미술대 도예과 학과장 무틀루 바스카야(MUTLU BASKAYA)가 제공해준 전시회 도록을 번역한 글이다.

'토파슈 부르사 아나톨리언 자동차 박물관(Tofaş Bursa Anatolian Cars Museum)은 투르키예 최초이자 유일한 Anatolian Cars Museum입니다. 

총1만7000㎡의 면적을 차지하는 Umurbey Neighborhood의 오래된 실크 공장은Tofaş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2002년 6월 8일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부르사 최초의 세라믹 비엔날레가 열렸는데, 이 장소를 결정하는 동안 비엔날레의 다른 두 큐레이터인 Fatma Batukan Belge와 İlhan 교수는 "우리는 이곳이 조각품에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될 것"이라고 결정했습니다.

Hacettepe 대학 미술학부도예과에서 도예가  김용문교수는 2010년부터 하제테페대학교 미술대 도예과에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김용문는 교수는 다른 도예과 교수들, 학생들과 함께 막사발장작가마에서  도자기를 장작가마에서  1300도까지 올려서 구워냈습니다.

그는 하제테페 대학교 미술대 도예과에 장작가마를 만들었습니다. 경사형 장작가마는 'Macsabal Kilns'라고 부릅니다. 세계 막사발 실크로드 심포지엄은 과거에는 한국과 중국 두 나라에서 조직되었지만 이번 장작가마 축조로 세 번째 2011년 터키 하제테페에서 국가 단위로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막사발은 한국 전통에서 일상생활에서 먹고 마시는 용도를  의미하지만, 김용문 그가 창시자인 이 심포지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술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 김용문 교수는  예술개발과 아티스트가 함께 작업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한 막사발 심포지엄까지 연출합니다. 

막사발은  모든 동시대의 도예가들을 품고 가는 형식으로 도자 조각을 선보입니다.

이 모든 환경에서 창작하고 전시할 수 있습니다.

그는 13년 동안 Hacettepe University 미술학부 도예과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조직된 심포지엄에서 초청된 해외 예술가와 우리 학생들의 참여로 심포지엄에서는 이들의 협력으로 만들어낸 자연 유약 나무 재의 가장 아름다운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높은 온도의 대형 조형물은 다양한 장소 또는 갤러리에 전시됩니다.

터키, 독일, 미국과 함께 미국, 프랑스, ​​카타르, 한국, 레바논, 이집트, 싱가포르, 우크라이나, 태국, 그리스. 12개국 24명의 작가들의  야외 조각으로 구성된 이 컬렉션은 부르사 토파슈 아나톨리언 자동차 박물관(Bursa의 Tofaş Anatolian Cars Museum)의 역사적인 장소에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작품들은 이곳과 완벽하게 어울립니다.

또한 비엔날레 개막 행사의 일환으로 Bursa Hilton에서 열리는 또 다른 국제 전시회는 H.Ü입니다.

G.S.F. 도자유리과 막사발 조각소의 소규모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입니다.

터키와 함께 아르헨티나, 크로아티아, 아일랜드, 한국, 레바논, 우크라이나, 태국, 그리스 9개국 15명의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이번 전시와 부르사 비엔날레의 메인 이벤트를 위해 파트마 두르마즈(Ms. Fatma Durmaz)와 그녀의 팀의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대학의 보물인 이 크고 작은 조각 컬렉션은,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막사발 도자 조각 컬렉션의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현재까지 모든 관리자의 승인을 받아 Hacettepe University에서 주최하고 앙카라 한국문화원의 후원으로 계속되는 심포지엄, 김용문의 회장단과 무틀루 바시카야(Mutlu Başkaya)의 조정하에 도자기학과의 교수진과 우리 학생들의 전폭적인 기여와 참여로 계속됩니다.

비엔날레 큐레이터 중 한 명인 일한 마샬르(İlhan Marasalı)는 조각품 포장을 지원해 준 레스보다와 멜리사 엔긴네르와 세르잔 필리즈( Melisa Engineri, Sercan Filiz)에게 감사드립니다.

토파스 아나톨리언 자동차 박물관장(Tofaş Anatolian Cars Museum  Aylin Tatlı), 행정 담당관 나지 소작(Naci Sozak), 박물관 강사 누르텐 쾨로울루(Nurten Köroğlu)와 전체 박물관 팀은 전시회 조직, 개장 및 수집에 전념했습니다.

귀하의 도움과 호스팅에 감사드립니다.'

부르사(튀르키예어: Bursa)는 아나톨리아 북서부 마르마라 지역에 있는 튀르키예의 대도시이다. 터키 내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가장 산업화가 이뤄진 대도시권 도시 중 한 곳이며, 부르사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부르사(오스만 튀르크어: بورسا)는 1335년에서 1363년 사이 오스만 제국의 첫 주요 도시이자 두 번째 수도였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페르시아어로 '신의 선물'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명칭인 휘다벤디가르(튀르키예어: Hüdavendigar, 오스만 튀르크어: خداوندگار)라고 일컬어졌고, 좀더 현대적인 별칭은 부르사의 도심 곳곳에 있는 공원들과 정원들과 더불어 도시 주변의 넓고 다양한 숲들을 나타내는 예실 부르사(튀르키예어: Yeşil Bursa, '초록색 부르사')이다. 고대에는 미시아의 올림포스산이라고 불렸던 울루산이 우뚝 서있으며, 스키 리조트로 유명하다. 부르사는 다소 정돈된 도시 성장을 하고 있으며 비옥한 평원에 접하고 있다. 초기 오스만 왕조의 술탄들의 마우솔레움들이 부르사에 있고 부르사의 주요 랜드마크에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 지어진 여러 대규모 건축물들이 있다. 또한 스파와 고고학 박물관을 포함한 몇몇 박물관들도 있다.

터키의 그림자극의 등장인물인 카라괴즈와 하지바트는 부르사에서 살고 죽은 역사적 인물들을 배경으로 하였다. 부르사는 또한 이스켄데르 케밥, 이곳의 밤을 절여 만든 마롱 글라세, 복숭아, 로쿰 등의 튀르키예 요리로도 알려져있다. 부르사는 울루산 대학교가 있으며, 부르사 거주민들은 튀르키예에서 가장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진 지역 중 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이즈니크(니카이아), 무다니아, 제이틴바으 등의 옛 도시들이 부르사주에 있다.

2015년에 부르사는 인구가 185만4285명이었다. 부르사주는 284만2000명이었다.

연도별 인구.
연도별 인구.

부르사의 현재 위치 인근의 가장 오래된 인류의 정착지는 대략 기원전 5200년 전에 세워진 을르프나르 회위위(튀르키예어: Ilıpınar Höyüğü)이다. 

부르사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기원전 202년에 비티니아의 왕 프루시아스 1세에게 준 고대 그리스인들의 도시 키오스에서 생겨났다. 프루시아스는 키오스를 재건하고 프루사(고대 그리스어: Προῦσα)로 도시명을 바꿨다. 128년 간의 비티니아의 지배가 끝난, 기원전 74년에 마지막 비티니아의 왕 니코메데스 4세가 로마에 나라 전체를 유증으로 넘겼다. 초기 로마 유물들이 20세기 초 부르사 인근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여성의 은제 화장 기구로 이뤄졌으며, 현재는 대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1326년에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 영토였던 부르사를 차지했고, 그 이후에 부르사는 초기 오스만 제국의 첫 주요 중심도시가 되었다. 이에 따라, 부르사는 14세기 내내 상당한 규모의 도시 성장을 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동트라키아의 에디르네(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정복하고, 1363년에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지만, 부르사는 오스만 제국의 정신적 상업적 중요성을 유지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는 부르사에 1390년과 1395년 사이 바예지드 퀼리예시(바예지드 1세 종교 시설)와1396년에서 1400년 사이에 부르사 울루 자미를 세웠다.

1402년에 바예지드가 티무르의 군대에게 앙카라 전투에서 패한 후, 티무르의 손자인 무함마드 술탄 미르자가 부르사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부르사는 메메트 2세가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킬 때까지 오스난의 가장 중요한 행정 및 상업 중심지로 남았다. 1487년 부르사의 인구는 4만5000명이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 동안에, 부르사는 왕실용 비단 물품의 원천이었다. 이 지역 비단 생산품을 제외하고, 이란, 때로는 중국의 비가공 비단을 수입했으며, 17세기까지 오스만 왕실을 위핸 카프탄, 배게, 자수, 및 다른 비단 물품들의 주요 생산 중심지이었다. 1923년에 터키 공화국이 건국됨에 따라, 부르사는 터키의 가장 산업화된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부르사의 경제 발전은 인구 증가에 따라 이뤄졌고 부르사는 튀르키예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 되었다.

부르사는 전통적인 관광지였고, 오스만 제국이 유럽 영토를 상실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동안에 발칸반도에서 아나톨리아로 이주한 다양한 민족 배경을 지닌 난민들의 중심지였다. 가장 최근 발칸반도 터키인들의 이주는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대략 150,000명의 불가리아계 터키인들을 터키로 추방시킨 1940년대에 발생해서 1990년대까지 이뤄졌다. 이 150,000명의 불가리아계 터키인 난민들 가운데 3분의 1(1/3)은 부르사에 정착했다. - 위키백과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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