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마주했을 때 놀랍도록 설움이 복받쳤다

 고래의 등처럼 잠시 떠올랐다가 

 영영 붙박여 가만한 이름

 

삶의 바다 한가운델 사력 다해 떠받친

 굽은 가장의 등 같이 가슴 먹먹해지기도 하는

 

 먼 항로의 지친 목숨들이 깃들 때

 그중에 있어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면

 또 누군가에게 내밀어 따뜻한 등이 되고 싶은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밀려 다시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묵묵히 배웅하는 이름

                              - 「풀등이라는 이름」/구향순

  1연 1행 ‘처음 마주했을 때 놀랍도록 설움이 복받쳤다’를 처음 마주했을 때, 계속 읽고 싶어졌다. 대체 무엇 때문에? 2, 3행을 단숨에 읽었다. ‘고래의 등처럼 잠시 떠올랐다가/영영 붙박여 가만한 이름’을. 그러자 더 늘어나는 의문. 아니, 고래처럼 물속에서 유영하다가 잠시 수면 위로 부상하였는데 그대로 ‘영원히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고... 곧 그 이름이 ‘풀등’이며, ‘강물 속에 모래가 쌓여 수면 위로 솟고 그 위에 풀이 수북하게 난 곳’이란 사실을 알았어도. 대체 화자는 왜 설움으로 가슴이 미어진다는 것인가? 

 2연을 읽고 의문을 해소하였다. 화자는 우연히 강에서 풀등을 보고, ‘굽은 가장의 등’을 연상한 것이다. 이러한 유추는 시인의 경험과 세상을 보는 눈과 무관할 수 없고, 이 시 메시지 형성에서 모티프이며 독자들의 독해에서도 기본이 된다. 그리고 ‘굽은 가장의 등’은 익숙한 이미지이지만 새삼스레 우리 심금의 현을 붉게 튕기고야 만다. ‘삶의 바다’에서 사력(死力)을 다해 가족의 생존을 지탱하는 그 궁핍한 굴곡에 어찌 그 가족으로 간과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3연을 읽으며 그 ‘설움’이 ‘굽은 가장의 등’에 국한되지 않고 그 내포와 외연이 크게 확장되며, ‘놀랍도록 … 복받쳤다’는 감동의 이유를 드디어 제대로 알게 된다.(그러고 보니, ‘굽은 가장의 등’이 아니라 ‘굽은 가장의 등 같이’라고 했다) 풀등은 ‘먼 항로의 지친 목숨들’이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따뜻한’ 성역(聖域)이다. ‘다시 살아갈 힘’. 자신도 긴 항해를 하는 고단한 몸이었는데, 이웃의 같은 삶을 깊이 동정하고 그만 자신을 그들에게 휴식처로 바친 헌신의 존재, 즉 희생을 순명(順命)으로 감행한 성인(聖人)이기도 하다. 아 그래서... 그렇다면 시인은 풀등을 보며 예수와 같은 존재를 연상하였다는 것인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성경』 마태복음 11 : 28) 하지만 화자는 감히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 더 말한 것인가. 

 이어지는 4연,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밀려 다시/삶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묵묵히 배웅하는 이름’에서, 우리는 작중 그 물결들처럼, 그 이름과 그 모습을 우리의 가슴에도 담고 휴식 이후 계속되어야 할 우리의 삶도 의식하게 된다.(사족 : 배웅은 단순한 작별이 아니다. 떠나가는 이를 공경하면서 일말의 미련을 해소하고 유대를 지속하는 작별이다)    

 비정하고 비열한 경쟁의 와중, 학업, 취업, 결혼, 주거, 육아, 승진 문제로 힘겨운 젊은 세대가 지칠 때마다, 우리의 시선을 아래로 위로 교차 수렴하는 긴장을 유발하기도 하는 이 시를 한 번 더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내밀어 따뜻한 등이 되고 싶은’ ‘풀등’이 시인과 화자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기성세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우리는 거리에서 무표정하게 지나치거나 세대차로 낯설어 하지만 이 시에서처럼 성찰의 시간에는 누구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그 ‘먼 항로’가 힘겹다고 어린 자식들을 강제로 동반하여 극단 선택을 하는 젊은 가장들도 있다. 더 견디기 어렵게 힘 든다면, 주위를 한번 둘러보라. 분명 ‘또 누군가에게 내밀어 따뜻한 등이 되고 싶은’ 평범한 이웃이 있다. ‘밀물처럼 밀려왔다 [‘풀등’에서 쉬고] 썰물처럼 밀려 다시/삶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하나로,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밀려 다시/삶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묵묵히 배웅하는 이름’이.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