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예술가들은 자화상을 남기기도 하였다. 강력한 자의식과 유별난 자기애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인간 탐구에서 무난하고 효율 높은 방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예술 창작은 인간 자체, 그리고 인간의 삶을 통찰하는 작업과 관련 있고, 편리하고 정확하게 탐색할 수 있는 대상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렘브란트, 고흐, 수잔 발라동, 뭉크, 프리다 칼로, 서정주, 이상, 구본웅 등등 열거가 힘들며, 그들의 자화상은 이미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인간 이해에 여러 시사를 주고 있다. 다음 시도 자화상의 하나이다.     

 오랜만에 후배 문사들과의 모임 시간 기다리며/발코니에 나가니/아파트에 벚꽃이 만발./30여 년 눈비 맞고 거무튀튀해진 동(棟) 건물들이/분홍빛 살짝 입힌 하얗고 싱싱한 구름들을 무릎에 둘렸다./위에서 내려다보는 꽃구름들,/땅이 하늘이 될 때도 있군./가만, 저기 저 구름엔/얼마 전 혼자 하얗게 피어 걸음 멈추게 했던/목련이 들어 있다./내가 봄이다! 하듯 피어 있었어./지금 한창 핀 벚꽃들과 숨 같이 쉬고 있는 그의 곁에 가면/철 지난 그의 행색 완연하겠지./볼품없이 땅에 떨어져 뒹구는 꽃잎도 있겠지./그만 다른 꽃구름한테 가 보라 할 거야./다른 꽃구름? 눈길을 옮기려다/가만, 이게 목련만의 일일까?/후배들 모임에 끼어들면 나도 목련./그 속에 들어가선 숨 어떻게 쉬지?/시선을 던져둔 채 생각을 가다듬는다./오늘 저녁 모임에 들어가선/밝은 구름 속에 어둠 한 덩이 아니라면/어떤 숨 따위는 잊자

                                                               -「목련」/황동규  

 

 벚꽃과 목련의 대조. 벚꽃은 후배 문사들이고 목련은 그들의 선배인 화자이다. 벚꽃은 ‘분홍빛 살짝 입힌 하얗고 싱싱한 구름들’이고, 한때 ‘내가 봄이다!’고 자부하던 목련은 ‘볼품없이 땅에 떨어져 뒹구는 꽃잎도 있’는 ‘철 지난’ ‘행색 완연’하다. 인간의 삶도 전성기도 한 철에 불과하며, 경과의 거대한 수레바퀴, 그 회전과 전진을 각성하는 화자의 내면이 이 대목에서 이미 선명하다. 장강의 물결. 배가 항구를 떠나가기 직전에 울린 묵직한 고동. 그래서 또 ‘위에서 내려다보는 꽃구름들,/땅이 하늘이 될 때도 있군.’이라 하였나 보다. 이치에 따라 후배 세대에게 이제 좌담에서 중심을 넘기고 주변에 머물겠다, 심지어는 사라질 준비마저 하겠다는 여운이 은은하다. ‘가만, 이게 목련만의 일일까?’란 자문(自問)의 메시지는 독자들에게 잘 전달되었을 것이다. 노년의 자기성찰과 자기경계는 자신을 ‘밝은 구름 속에 어둠 한 덩이’가 아니게 한다. 또 바로 그래서 화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꽃구름들’을 계속 ‘위에서 내려다보는’ 어른이게 할 것이다. 다음 시 역시 다른 세대를 전제로 하는 자화상이다.   

 나는 매일 착한 꿈을 꾸고 꾸준하게 운동도 하는데,/여전히 아버지가 거울 속에 있는 것이다/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누군가의/이전 삶이 그네를 타며/내 얼굴 위를 오고 가는 것이다/바람이 불어 움직이는 그네/바람이 불지 않아 움직이는 그네/그는 여전히 친절한 사람일까/술에 취하면 난폭한 사람이 될까 칼을 들고/아무리 썰어도 다시 자라나는 손목/뼈가 보이도록 파내고 쑤셔도 지워지지 않는 거대한 점/나는 되짚고 되짚어 보지만/이 단단한 물속을 알 수 없어서/물의 억양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이전의 삶이, 이방의 기도문처럼 나를 읽고 있는 것이다/그래야 하는 것처럼/그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나를 위로했던 한 선생은/공공연한 가계의 비밀처럼/가족들로부터 버림받고 혼자 죽었지/그것은 아름다운 불행이라고 한 작가가 말했지만/보라, 아름다움이 다가온다/그는 목매달고 곧 사람들에게 잊혀졌지/그 누구도 모르는 채로/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기억되고 있는 것들/경악스러운 마음으로 그 멀고 단단한 바닥을 아무리 밟아도/깨지지 않는 것들/어둠 속에서 지친 마음이 발을 뻗는다/내 발이 아닌 누군가의 발이 닿는 느낌/누군가 내 발을 바꿔 치는 느낌/나는 죽어 그네가 되겠네     

                                                               -「피붙이」/김안  

 

 앞 시와 사정이 아주 다르다. ‘여전히’ ‘거울 속에’ 있는 ‘아버지’는 화자의 아버지이면서도 아버지 세대를 총괄하는 그 제유(提喩)로 보이고, 세대 갈등도 포함되어 있는 사회문화 차원의 ‘어둠 속에서 지친 마음’의 토로라서, 독자들의 공감 정도는 다양할 듯하다. ‘아버지’는 ‘누군가’, ‘그’, ‘바람이 불어 움직이는 그네/바람이 불지 않아 움직이는 그네’로 환치(換置)되고 있다. ‘그네’는 상승과 하강을 그것도 앞뒤로 끝 모르게 반복하는 요동의 환유(換喩)로 보인다.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인가. 하지만 그 구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 누구도 모르는 채로/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기억되고 있는 것들’이기에. 분명한 것은 화자는 ‘아버지’와 달리, ‘매일 착한 꿈을 꾸고 꾸준하게 운동도’ 하지만 결국 그 ‘그네’가 되고 말겠다는 불행한 각성이다. 아니 이미 화자는 자신이 그 ‘그네’라고 반쯤 의식하고 있어 보인다. 그리고 ‘가족들로부터 버림받고 혼자 죽’는 건 ‘아름다운 불행’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자신에게도 경고하는데, 덧없는 자조이자 차라리 자위인 것인가. 강력한 부정인가. 아니 부정의 부정, 부정을 부정하겠다는 여운이 있는 건가. 이제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화자가 ‘되짚고 되짚어’ ‘이 단단한 물속(거울 속 아버지의 속)을 알 수’ 있고, ‘물의 억양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이 시를 읽어보니 ‘여전히’ ‘거울 속에’ 있는 ‘아버지’는, 애초부터, 화자의 아버지이면서도 화자가 낯설어하는 화자의 자화상이었다...     

 앞 시에는 안분자족(安分自足)의 각성과 유종의 미 지향이 선명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화자는 관조를 지속하며 경험과 지혜로 혹 있을 수 있는 일탈을 이치에 따라 절제하는 안정된 자아를 재확인하며 자신과 세상에 여유롭다. 뒤 시는 자기 확인 과정에서 자신이 부정하였던 앞 세대의 삶과 운명을 자신의 삶에서 언뜻 보며 애매한 착종과 반발을 연속하는 가운데, 세파와 욕망에 자아훼손 불안이 심화되는 국면을 포착하고 있다. 앞 시의 화자도 젊은 시절엔 혹 그 비슷한 양상이 아니었을까. 

 독자 여러분, 우리도 자신의 자화상을 한번 그려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흔한 자서전 말고요. 두 시의 화자들처럼, 나아가 렘브란트(1606-1669)처럼, 생애의 굴곡 굴곡에서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지긋이 응시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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