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로(生老)’와 더불어 ‘병사(病死)’가 우리의 운명이며, 그 누구도 이 진전의 확장과 수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가족과 이웃의 질병과 사망을 목도하고 있지만, 자신의 현상이기 이전에는 제대로 실감하지 못 한다. 어쨌든 생존과 욕망이 우선이라서 미래의 그 국면을 늘 의식할 수 없고, 꼭 해야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급기야 그것이 닥쳐서도 우리는 지난 삶의 한계와 오류를 비로소 각성할 수 있고, 우리의 혼이 의지할 어떤 진리를 개오(開悟)하고 평명(平明)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든 준비가 되어있다면 혼란을 덜고 유감도 줄일 수 있다. 결별과 승화도 의연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최인호(1945-2013)는 자신에게 암이 발병하자, “이제 내 차례”라고 독백하였다. 이 담담한 순서의식 한마디에 그의 사생관이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물질 위주의 시대에서도 여전히 생로병사를 헤아리며 그 경계에서 지침으로 삼을 인문 지혜를 요망한다. 이런저런 텍스트가 저마다 요체(要諦)를 표출하고 있는데, 문학작품은 그것을 구체화하며 경박하지도 중후하지도 않게, 나아가 재미있고도 유익하게 제시하여 우리의 주목을 끌어 왔다.        

  

사람에게도 오지만 떠돌이 개에게도 온다

빈집 마을 시름시름 여위어가는 전봇대에도 오고

폐사지 서늘한 주춧돌에도 오고

주름살 많아진 늙은 의자에게도 온다

첫서리 내리듯 온다

치매, 이 고이헌 불청객은

 

 ‘사람에게도 오지만’ ‘떠돌이 개’에게도 ‘치매’가 ‘온다’고 해, 우리의 독해에 심상찮은 변조의 파문이 일고, ‘빈집 마을 시름시름 여위어가는 전봇대에도 오고’에서 그 파고가 확대되며, ‘폐사지(廢寺址) 서늘한 주춧돌에도 오고’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상식과 더 마찰을 일으키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이 불연(不緣)의 ‘서늘한’ 심미성(審美性)에 ’시름시름’ 침윤되기도 한다. 미처 수습되지 않은 마찰의 여운은 ‘주름살 많아진 늙은 의자에게도 온다’에서도 이어지고, 이후에도 긴장으로 지속된다. 그런데 그 ‘늙은 의자’와 화자와의 사연이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우리 집에 와서 오래 노역한 나무 의자는

아직도 제 몸이 풍광 좋은 산기슭에 온새미로 서 있는

젊은 물푸레나무인 줄 안다

다리 부러져 큰 수술 받은 것도 여러 번

이제는 참 아슬아슬 버티는 몸이건만

제 몸에 앉은 무거운 나를 후르르 날아왔다가

후르르 날아갈 몸 가벼운 새인 줄 안다

 

이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저 노구의 무릎 위에 다시는 내 몸을 앉히지 않는 것

 

그리하여 

저 나무 의자를 고즈넉이 홀로 심어두는 것

 

어떤 날엔

나에게도 치매가 온 듯 심어둔 의자 나무에

맑은 물 흠뻑 적셔주기도 하는 것

치매 앓는 의자와 나란히 서서 해시시 웃어보기도 하는 것 

                                          - 「늙은 의자에게도 온다」/문창갑

 

 우리는 2연에서 ‘오래 노역한 나무 의자’의 겉과 속을 안다. 여러 번 부러진 다리에다 노쇠를 거듭하여 ‘이제는 참 아슬아슬 버티는 몸’이건만, 자신이 고향의 태어난 제자리에 온전하게 서있는 ‘젊은 물푸레나무’이며, ‘무거운 나를 후르르 날아왔다가/후르르 날아갈 몸 가벼운 새인 줄 안다’. 의자는 화자에게 여전히 사이좋게 자신의 가지에 걸터앉아 역시 ‘풍광 좋은 (저쪽) 산기슭’을 함께 바라보자고 한다. 하지만 ‘후르르 날아갈 몸 가벼운 새’가 아니라고 할 수 없을 화자는 3연에서 아 영 ‘후르르’ 사양하고, 4연에서 ‘저 나무 의자를 고즈넉이 홀로 (땅에) 심어두’기로 한다. 치매 ‘의자’와 화자의 상호 배려. 이 장면이 현재의 자신과 관계가 있든 없든 가슴 저릿한 독자들이 없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공감에서 1연의 마찰 여운이 어느새 종적 묘연. 그만큼 질병은 모든 사물에게 필연이며,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동정(同情)에서는 사물의 구분이 덧없다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4연, ‘의자 나무에 맑은 물 흠뻑 적셔주’는 화자, 이미 치매가 시작되었는지 모를 화자의 이 놀라운 사랑의 모습에 심장 뭉클하며, ‘치매 앓는 나무 의자와 나란히 서서 해시시 웃어보기도 하는’ 정경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손 흔들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나무 의자와 화자처럼 미소를 짓다가, 미래의 자신과 혈친이나 지인을 본 듯한 감상(感傷)에 나무 의자와 화자와는 달리 그 미소에 그만 눈물이 살짝 어릴 지도 모르겠다.  

 「늙은 의자에게도 온다」에는 우리의 한 보편 운명이 부각되어 있고, 그 위무(慰撫)의 미덕이 후광으로 점차 드러난다. 겸손과 해학이 어우러진 통각(統覺)과 통찰(洞察). 치매 환자에게 우리로 하여금 ‘맑은 물 흠뻑 적셔주기도’하게 하고, ‘나란히 서서 해시시 웃어보’게 할 천진(天眞)한 긍정의 인정(人情). 아니 가족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게 하는 작중과는 다른 치매 행동도 ‘의자 나무에 맑은 물 흠뻑 적셔주기도 하는’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역설의 여유마저. 시인의 다음 시에도 그런 경향의 인정이 흐른다.  

 

소읍 터미널 뒤 공중화장실//옆 칸에서 누가 울음을 누고 있더라//얼마나 오래 참은 울음인지//얼마나 많이 삼킨 울음인지//길게,//섬진강 물길만큼 길게 누고 있더라//

                                                                          - 「약전」

 

 ‘얼마나 오래 참은 울음인지’, ‘얼마나 많이 삼킨 울음인지’... 문면 그대로 읽어도 좋고, 무엇의 환유(換喩)로 읽는다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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