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일보 현판. (사진=수원일보 DB)
수원일보 현판. (사진=수원일보 DB)

수원일보가 지난 주말 수원시의 역사와 문화·관광 중심인 화성 안으로 입성했다. 동수원 시대를 끝내고 행궁동으로 이전했으니 이제부터 ‘성안 사람’, 아니 ‘성안 신문’이 됐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예전엔 ‘성안’과 ‘성밖’의 차별이 존재했다. ‘문안’ ‘문밖‘이라고도 했다. 성안 사람들은 ’가진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실제로 수원의 부자들이나 유지들은 대부분 성안에 살았었다.

물론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부유층은 신도시의 넓고 전망 좋은 아파트에 산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성안은 수원의 중심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화성과 화성행궁, 수원시립미술관, 수원화성박물관, 팔달구청, 선경도서관이 있으며 100년 넘은 학교와 교회, 성당, 사찰들도 많다. 팔달문 인근의 시장들도 ‘왕이 만든 시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오래됐다. 수원의 중심인 팔달산 자락에는 수원향교와 경기도청 팔달청사(옛 도청), 수원문화원(수원시민회관)도 있다.

수원일보가 성안으로 들어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오랫동안 거주해 온 수원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고 관광객이 붐비는 곳이라서 구구절절 속 깊은 이야기, 다양한 흐름을 가장 빠르게 접할 수 있다. 지역 언론이 마땅히 자리 잡아야 할 곳이라는 얘기다.

수원을 대표하는 미디어 수원일보가 성안 행궁동으로 이전한 것은 이런저런 면에서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수원일보는 인연이 있다.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된 후인 1987년 11월 28일 언론기본법이 폐지됐다. 언론사에 이른바 ‘보도지침’을 내리던 문공부 홍보조정실도 없어졌다. 프레스카드제와 ‘1도 1사제’가 폐지되고 언론사 설립요건은 완화됐다. 언론자유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 전국에서 언론사 설립 붐이 일었다.

이 시기에 나와 몇몇이 주간 타블로이드판 수원신문을 만들기 위해 뜻을 모았다. 그런데 우리보다 행동이 빨랐던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수원일보는 1989년 9월 30일 수원신문으로 창간됐다.

창간 초기 기자들과 친하게 지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허모 부장을 비롯해 권모 기자, 박모 기자 등과 자주 만나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그러나 이들이 그만 둔 다음부터는 조금 소원해졌다. 그러다가 2005년 8월 9일 인터넷신문으로 재창간 되고 제7대 김갑동(2019. 3.31~현재) 대표 이사가 취임한 후 다시 연을 맺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수원일보가 걸어 온 길은 꽃밭만이 아니었다. 한때 네이버.카카오와의 계약이 끊기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고비를 잘 넘겨 현재는 네이버, 카카오, 구글, 줌 등과 뉴스검색 제휴를 맺어 전세계로 뉴스와 칼럼 등을 내보내고 있다.

수원일보의 파급력은 놀랍다. 얼마 전에 내가 쓴 칼럼은 조회수가 2만 건에 육박했다고 한다. 그 글을 보고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에서 전화가 왔다. 원고청탁에서부터 20년만의 안부, 관련 자료 문의 등 다채로운 내용의 전화를 받으면서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역시 글은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내 글을 주시한다니...

“인터넷 시대,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미디어들이 난립한 세상입니다. 수원일보는 이런 혼란스런 시대 변화 속에서도 정확한 정보의 가치판단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독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드리고 언제든 독자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미디어가 되도록 변화의 중심에 서겠습니다.”

김갑동 대표이사의 말처럼 수원일보는 기획특집, 칼럼, 사설 등 지방분권화시대에 걸맞는 차별화된 콘텐츠가 있다. 수원의 과거와 현재를 사랑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미디어로써 독자와 함께 성안 행궁동 시대를 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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