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 앞 삼정승 느티나무. 품(品)자형 삼괴목(三槐木)이라고도 한다. 1789년 신읍건설시 행궁을 건립하고 100여년 된 느티나무를 심은 것으로 생각된다. (사진=김충영 필자)
화성행궁 앞 삼정승 느티나무. 품(品)자형 삼괴목(三槐木)이라고도 한다. 1789년 신읍건설시 행궁을 건립하고 100여년 된 느티나무를 심은 것으로 생각된다. (사진=김충영 필자)

인간은 나무를 빼고 살 수 없을 만큼 나무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왔다. 

나무는 목재와 부산물을 발생하고, 국토보존은 물론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주고, 문화자원으로서 인간의 정서활동에 기여한다. 숲의 또다른 혜택은 대기정화, 수원함양(水源涵養), 기상완화, 소음방지, 방재기능의 효과가 있다.

나무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줄기나 가지가 목질로 된 여러해살이 식물’ 즉 ‘목본(木本)’으로 된 식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목본(木本)의 뜻을 새겨보면, ‘목(木)’은 뿌리와 줄기 형태를 본뜬 글자다. ‘본(本)’은 ‘목(木)’자에 ‘일(一)’자, 뿌리를 더하면 ‘본(本)’이 된다. 즉 나무의 근본은 뿌리라는 의미다.

‘수원역사속의 나무’ 책 표지. 2021년 10월 28일 수원문화원이 출간했다. (사진=수원시문화원)
‘수원역사속의 나무’ 책 표지. 2021년 10월 28일 수원문화원이 출간했다. (사진=수원시문화원)

수원문화원은 2021년 10월 28일 ‘수원 역사 속의 나무’ 책을 발간했다. 저자인 김우영(수원일보 논설실장, 화성연구회 이사)은 ‘수원의 오래된 나무들이 나를 불렀다’편에서 느티나무, 은행나무, 뽕나무, 소나무, 상수리나무와 메타세콰이어, 비슬나무, 라일락 나무, 귀롱나무, 회화나무, 팽나무와 물오리나무로 구분해 저술하고 있다.

신읍건설 이전 시기에 수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1208년(고려 희종 4년)에 창건한 봉녕사 경내에 있는 나무높이 9.4m, 나무둘레 2.8m, 약 800년 된 향나무를 들 수 있다. 

이 시기 남아있는 나무는 향나무 2그루, 느티나무 10그루, 은행나무 2그루, 회화나무 1그루 등 15그루가 존재한다. 

봉녕사 향나무. 1208년(고려 희종 4년) 창건당시 심은 나무로 약 800년이 됐다.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봉녕사 향나무. 1208년(고려 희종 4년) 창건당시 심은 나무로 약 800년이 됐다.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화성건설 이후 1950년 한국전쟁 이전시기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나무를 식재했다. 그러나 현재 생존하는 수목은 느티나무 8그루, 은행나무 2그루, 비술나무 1그루와 노송지대 일원에 산재된 지정 노송 34그루가 생존하고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나무 중 수원에서 가장 대표적인 나무는 화성행궁 앞 ‘삼정승 느티나무’를 꼽을 수 있다. 행궁앞 느티나무는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됐는데 수령 약 370년이 됐다. 화성행궁을 1789년에 건립하여 234년이 됐으므로 당시 100여년이 된 느티나무를 심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궁궐 앞에 괴목을 심은 기원은 중국 주나라 때부터라고 전한다. 어진 3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나무그늘 밑에서 어진 임금과 함께  선정을 베푼다는 의미로 심었다. 

이후 한문 문화권(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궁궐 앞에 반드시 괴목(느티나무 또는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 이 세 그루 나무를 삼괴목(三槐木), 품자(品字)나무라고 한다. 조선시대 한양에 있던 5대 궁궐과 여러 곳의 행궁 앞에도 모두 3그루의 괴목을 심었다. 

그러나 다른 궁궐의 삼괴목(三槐木)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사라졌다. 대한민국에서 온전한 삼괴목(三槐木)은 화성행궁이 유일하다. 

화성건설 시기 심은 나무에 관한 기록은 ‘화성성역의궤 재용 식목편’에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성안 매향동, 팔달산, 모든 성벽 안팎, 대천의 가장자리와 성밖의 용연, 관길야, 영화정 이북에 1794년부터 1797년까지 매년 봄, 가을로 7차례,

o 왕실에서 내려준 단풍씨앗 만년지 1봉, 비변사에서 보내온 솔씨 2석, 탱자씨 1석, 뽕나무씨 2석5두, 밤2석, 상수리 42석13두, 이상의 값 89냥8전, 

o 오얏나무 7,350주, 복숭아·살구 등 각색 과목 582주, 이상의 값 394냥, 

o 연밥 따는 품삯 8냥3전5푼, 

o 화초와 버드나무를 포함하여 소나무를 캐는데 든 품삯 217냥,

o 파종품삯 1,080냥, 양미 30석9두3승, 값 137냥7전9푼

o 마소운임 35냥

o 합계 1,961냥 9전 4푼』

 

1794년부터 1797년까지 이루어진 식목과 파종에 관하여 성안과 밖으로 구분하여 식재 장소를 밝히고 있다. 

정조는 수원을 나무로 가득한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2년 뒤인 1799년(정조23) 봄에도 성안과 밖에 7만 256 그루, 이 가운데 소나무 5만 그루, 뽕나무 1만 그루를 식재했고, 장안문 밖에서 지지대 고개까지 버드나무 3,087그루를 심었다고 ‘일성록 1799년(정조23) 3월 26일자에 기록하고 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어지는 능행길에 언제 얼만큼 소나무를 심었는가 하는 기록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1795년 윤2월 9일부터 행해진 혜경궁 홍씨 회갑연이 화성행궁에서 개최가 결정되자 서울에서 수원으로 연결되는 과천 남태령길의 관리에 따른 문제점이 제기된다. 

1794년 4월 2일 경기감사 서용보가 정조의 허락을 받아 시흥로 건설을 시작했다. 이때 노량진에서 시흥으로 이어지는 길을 새로이 건설하고 안양 만안교를 비롯해 필로(蹕路)를 수축(修築)하고 19개의 표석을 설치했다.

지지대 고개에 나무를 심은 기록은 1831년 화성유수 박기수가 재임시 편찬한 ‘화성지(華城지)’ 필로(蹕路)조에 지지대에 식재한 내용이 나타난다. 

‘정조 기유(1789) 현륭원을 옮긴 뒤 조정과 왕실에서 값을 치르고 길 주변의 전답을 사들이고 눈을 치우는 일을 담당자한 자의 세금을 면제했으며, 이를 수리소에 소속시켰다. 장정을 고용하여 눈을 치우고 길을 관리하게 했는데 부족하면 공전(公錢)으로 지출 토록하고 길 좌우에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서로 연이어 심었다.’ 고 적고 있다.

이에 앞서 정조2년(1788) 1월 비변사에서는 제언절목(堤堰節目)을 지어 받쳤다. 제언(堤堰, 강이나 바다의 일부를 가로질러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 두는 구조물) 주위에 나무를 심는 조항이 들어있다.

축만제(서호) 제방 소나무.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축만제(서호) 제방 소나무.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정조19년(1795)에 만석거가 축조되고 이후 만년제, 축만제가 설치됐다. 정조22년(1798) 2월 13일에 공역을 시작하여 3월 4일까지 원령(園令)이 수호군 50명, 안산지기(案山直)70명을 데리고 소나무 6만9234그루를 만년제 일원에 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축만제인 서호에도 많은 나무가 현재에도 건재하고 있음을 살펴볼 때 이즈음 축만제와 만석거 주변에도 나무를 심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관리되던 수원의 소나무는 한말 왕실에서 벌채하여 왕실경비로 쓰는가 하면, 일제강점기 팔달산 등에서 군사용으로 벌목했다는 기록이 있다. 1938년 일본인 도쿠미쓰 노부유끼가 조선의 전통마을 숲을 조사하고 간행한 『조선의 임수』라는 책에 노송지대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있다. 

1990년대 노송지대 소나무.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1990년대 노송지대 소나무.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당시까지 소나무는 장안문에서 500m 구간에 수양버들 큰나무가 40여주가 남아 있었고, 정자리 근처에도 40~100cm 정도의 소나무 150여주가 식재되어 있고, 북쪽의 도로변에도 30여주, 송죽리 소나무림에도 120여주가 있어 1930년대까지 500여주의 울창한 소나무림이 있다고 적고 있다.

장안문에서 지지대에 이르는 소나무림은 해방이후 혼란한 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무분별하게 벌채됐다. 혼란한 시기를 지나면서도 도로변에는 많은 수의 노송이 가로수로 남아 있었다. 

그나마 남았던 소나무는 1980~199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매연과 환경오염으로 노송지대의 소나무 군락은 사라지는 위기를 맡게 된다. 

수원의 소나무는 1995년 7월 1일 민선시기를 맞으면서 부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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