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나치 야영장에서 마주 보이는 낮은 산

홈 산은 나의 고향집

포근한 눈빛의 나무들이 가족 같았네

 

나의 상처를 만져 주는 키가 큰 소나무

일곱 살 때 하늘 가신 아버지였네

 

산허리를 내려와 흐르는 산물이 누님 같았네

젊은 나이에 가신 당신의 울음소리 깊었네

그 산물 한 점 뜨니

손등에서 들국화가 피어 올랐네

 

하늘에 가서도 자식 걱정만 하시는

낮달 어머니

                        - 「웨나치(Wenatchee)의 홈 산(Mt.Home)」/김영호

 

 시간과 공간은 인간 삶의 제약이기도 하다. 최근에 노년의 한 정신분석학자가 그 어떤 각성을 달성한 인간에게도 사망은 여전히 불식되지 않는 근원 불안이라고 하였다. 때가 되면 조금도 미련 없이 가야 마땅하다고 한 신학자의 발언에 시원하게 공감하기는 하였지만, 내심 그 철리에 철저하지 못한 심경을 의아하게 여겼었다. 그러고 보니 신앙과 사랑에 가없이 위대하였던 천국 지향 예수께서도 삶의 종극에 임박하여 그 운명을 탄식하는 심정을 언급하지 않았던가. 일순에 불과하였지만 그 면모가 오히려 우리 인간을 진정 감동하게 한다. 우리는 그 훨씬 아래 단계에서 결국 그 한계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체념하고 겨우 순응할 뿐이다. 한편 우리 삶에서 공간의 의미도 시간처럼 제약으로 인식되면서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농경 등 생업과 정주의 편의에 기인하여 평생 일정한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않던 인간은 그 혜택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이동하는 새들 특히 철새들을 선망하며 공간 제한에서 해제되는 삶을 꿈꾸기도 하였다. 우리는 역마살을 꺼리면서도 부러워한다. 공간초월 염원은 시간초월 기구(祈求)와 함께 드디어 시공을 일탈하는 승화된 인간, 즉 ‘신선(神仙)’을 탄생시켰다. 선화(仙話)에 등장하는 신선은 스스로 비월(飛越)하기도 하고, 용, 구름, 의자 등 영물(靈物)을 공간 이동에서 활용하기도 하는데, 애써 떠난 고향을 다시 찾기도 하여 주목된다.      

 그런 고향을 확인하게 하는 위 시는 우리를 향수(鄕愁)에 젖게 하면서 우리 삶의 시공 문제를 환기시켜준다. 시인은 웨나치가 ‘미 워싱턴 주 시애틀의 동부에 위치한 농촌’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망망 태평양 건너, 우리에게 낯선 멀고 먼 이국의 한 산이지만 화자의 묘사와 관련 심정에 어느덧 우리는 자신의 고향도 떠올리게 된다. 미국 어느 곳에 사는 교포일 수도 있고 여행객일 수도 있는 화자는 웨나치의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머무르다 문득 주변 정경에서 옛 고향을 상기한다. 나지막한 홈산에서 정든 고향집을 연상하고 그 산의 나무들에서 가족, 특히 어릴 때 돌아간 키 큰 아버지의 품을 접촉하고, 계곡의 청아한 시내에서 이른 나이에 별세한 누님을 시내 소리만큼 선명하게 손등에서 핀 들국화처럼 마주하며, 평생 자신을 걱정하였던 가녀린 홀어머니를 눈 붉히며 연상한다. 향수는 인간의 한 근원 회귀 충동, 시공을 초월하는 그립고 황홀한, 근원 불안을 불식하는 강력한 의식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현재 시공을 초월하는 화자의 그 심정에 공감하며 자신의 향수로 나아갈 수 있다. 현재에 예속된 그림자 의식이 아니라 현재를 예속하는 등불이며, 우리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실재 그 자체일 수 있는.  

 제어할 수 없이 강력하고 자연스러운 향수를 다룬 이 시에는 뜻밖에도 고향에 돌아가 묻히고 싶은 수구초심(首丘初心)을 제어하려는 이율배반 결의도 함축되어 있다. 일본의 승려 월성(月性 : 1817-1856)의 「將東遊題壁(동쪽으로 떠나며 벽에 쓰다)」의 둘째 수를 연상하게 한다. “男兒立志出鄉關 學若無成不復還 埋骨何期墳墓地 人間到處有青山(남아가 뜻을 세워 떠났네 고향을. 학문을 이루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으리. 죽어 뼈 묻을 곳이 어찌 선산(先山)뿐이겠나. 인간 세상 어디든 청산이 있도다) 

 그런데 이 모든 점검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의 그 고향은 이 시공에 없다. 우리의 추억 속에서만 더욱 선명할 뿐. 그래서인가. 이 시의 첫 연을 대면하자 말자 먼저 토마스 울프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 하리』(1940)와 이문열의 동명 소설 (1980)이 배경으로 떠올랐었다. 모든 실향민과 이 시를 읽으며 무더위를 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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