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이 최근 SNS에서 야권 강성 지지층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달 18일 서이초교의 젊은 여교사가 학부모의 악성 민원으로 고통을 겪다 자결하였고, 참다못한 교사들이 같은 달 29일에 궐기하여 교육권 보장을 촉구하는 대회를 열었는데, 그가 광화문 현장과 서이초교를 탐방하고 이달 4일 중앙일보에 탄식과 질타의 기고문을 게재하고부터다. 그 글에서 그는 악성 민원의 본질을 ‘내 새끼 지상주의’라고 규정하고, 우리 대다수의 과감한 성찰과 반성을 촉구하였다.  

 새삼스럽지만 작가 시인들은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다. 모두 ‘잠수함의 토끼’가 아니고 자처하지도 않지만 작품 이외에도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과 문제를 대신 성찰하면서 휴머니티를 묻거나 확인하려 한다. 우리가 찬성하든 반대하든 귀 기울여야 할, 우리 공동체에 제기하는 현재성 예언들이라고 하겠다. 더욱이 이번에 그가 다룬 주제는 우리의 대다수가 직접 간접 관여자이고, 가해자이고 피해자이면서 그간 짐짓 외면해온 문제이다. 한때의 현안으로 국한시키거나 넘길 수 없는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한 제언. 몇몇 교육자들이 제기하였지만 이 문제를 그 성격에 어울리게 침중하고 신랄하게 우리의 대다수를 공개 질타한 사례는 없었다. 그 글로 그가 공격받고 있는데, 제기한 주제와 다음과 같은 지적에는 무슨 훼폄이나 부정이 없는 듯하다.  

 

 ‘악성 민원’의 본질은 한마디로 한국인들의 DNA 속에 유전되고 있는 ‘내 새끼 지상주의’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내 새끼’를 철통 보호하고 결사옹위해서 남의 자식을 제치고 내 자식을 이 세상의 안락한 자리, 유익한 자리, 끗발 높은 자리로 밀어 올리려는 육아의 원리이며 철학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의 자식이 겪게 되는 작은 불이익이나 훼손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관계망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아이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내 자식’을 편드는 부모의 싸움으로 확전돼 교사를 괴롭히는 사례는 흔하고, ‘내 자식’을 편들며 달려드는 학부모의 태도는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와 같다고 경험 많은 교사는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내 새끼 지상주의’는 자식을 명품 시계나 고가 핸드백처럼 물신화한다. 이것은 이제 이 난세의 생존술이고 이데올로기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계층의 차이가 없이 고루 퍼져 있지만, 부유층 밀집지역의 ‘악성 민원’이 더욱 잦고 사납고, 위압적이라는 일선 교사들의 고백은 이들을 행세하게 하는 부(富)의 천민성을 증언하고 있다. 사실, 이 ‘내 새끼 지상주의’는 이 나라 수많은 권귀(權貴)들에 의해 완성됐다. 

                              -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김훈

 

 이 통렬한 지적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굳이 그럴 리 없지만 맹모삼천지교나 자식 내리사랑을 언급하며 정실 참작 운운한다면 실정과 해악을 비켜가려는 궤변에 불과하다. 해결 가망이 없어 보이기도 하여 더욱 절실하고 부끄러운 이 집요한 문제. 외면하다보면 잊어버릴 수도 있어 보이는 이 문제에 우리의 대다수는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결국, 상호 승복할 수 있는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노력을 우리가 다 같이 꾸준히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는 낯익은 공론으로 귀일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내 새끼 지상주의’의 사례로 전직 법무부 장관과 부인을 언급하여 온갖 악성 공격이 계속되고 있다. 젊은 여교사의 비극에서 그 폐단을 목도하고 직접 간접 승복한다면 그가 그 부연으로 제시한 사례에 침묵하여야 하지만 현실은 그도 누구도 예상했듯 역시 그렇지 않았다. 글의 해당 부분을 읽어보면 그가 두 사람에게 실망을 거듭하였지만 애초에 굳이 언급하려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일가가 관련된 재판의 과정을 보면서” 운운에서, 그 사건들의 사법 처리가 일부 마무리되었고 남은 심리도 마무리 단계인데도 여전히 혐의를 부인하는 모호한 언행에 실망이 심화된 듯하다. 

 글 말미에서 그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迷妄)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우리의 심경도 그와 같을 텐데,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다시 말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에 전직 장관이 향후 법정 판결과 무관하게 진솔한 한마디 구체 성찰을 표백한다면 우리는 거의 용납할 수 있을 것이다. 갈등으로만 끝나기엔 우리 백년대계 교육이 위중하기만 하다. 그래서 그 글에서 제시된 다음 해법도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 해법을, 우리가 소설가 그가 지향하는 ‘소설론’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정부가 내놓은 ‘해법’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아동학대 처벌법을 고쳐서 ‘정당한 지도 행위는 신고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조항을 신설하자는 것이다. 여야는 이 법안에 대해 의견이 접근해 가고 있다고 여러 매체가 보도했다. 이 법안이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정당한’이라는 한마디의 형용사는 며칠 전 야당이 방탄 국회라는 비난을 벗어나기 위한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정당한 영장청구에는 면책특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정한 것과 똑같다. 이것은 언어의 농간(弄奸)이다. ‘정당한’이란 한마디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 형용사는 매끄러워서 붙잡을 수 없고 아리송해서 기댈 수 없다. 이 몽롱한 형용사 한 개로 괴물을 막으려 한다면 더 큰 괴물이 달려든다. 두 번째 괴물은 더 많은 언어와 세련된 논리를 동반하고 달려들게 되는데 이 세련된 논리는 사태를 정돈하지 않고 더욱 헝클어 버려서 수렁으로 빠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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