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한 지역엔 이른바 ‘8경’ 또는 ‘10경’이란 것이 있다. 그 지역의 뛰어난 풍경이나 여덟 군데, 또는 열 군데를 일컫는다.

중국의 ‘소상(瀟湘)팔경’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소상은 소수와 상수가 합류하는 지역을 포함한 동정호 남쪽 주변 일대다.

△산시청람:아지랑이 감싸인 산골 풍경(위치:상담시 소산) △어촌석조:석양에 물든 한적한 어촌(도원현 무릉계) △원포귀범:저녁무렵 멀리서 돛단배가 들어오는 모습(상음 현성 강변) △소상야우:소상정 위로 쓸쓸히 밤비가 내리는 모습(영주시 소상정) △연사만종:안개에 감싸인 산사에서 종소리 울리는 저녁풍경(형산현 청량사) △동정추월:가을달이 비추는 동정호의 모습(악양시 악양루) △평사낙안:백사장에 가을 기러기가 내려앉는 모습(형양시 회안봉) △강천모설:눈발이 날리는 강가의 저녁 풍경(장사시 귤자주)이 소상팔경이다.

소상팔경은 우리나라 판소리 ‘심청가’의 주요 대목 중 하나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우리나라의 팔경은 관동 팔경ㆍ단양 팔경 등이다.

수원·화성시에도 팔경이 있다.

‘수원팔경’은 △광교적설(광교산에 눈 쌓인 모습) △팔달청람, 또는 팔달제경(안개에 감싸여 신비로운 팔달산) △남제장류(남쪽 긴 제방에 늘어선 버드나무) △화산두견(화산의 봄 진달래꽃) △북지상연(북지에서의 연꽃 감상) △서호낙조(서호에서의 해넘이 모습) △화홍관창(화홍문을 빠져나온 비단결 폭포수) △용지대월(용연에서 월출을 기다림), 또는 나각망월(방화수류정에서 본 동북각루의 달)이다. 

화성시의 ‘화성팔경’도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명승지를 중심으로 지정됐다.

제1경인 ‘융건백설’은 융·건릉에 눈이 내린 풍경이다. 융·건릉이 있는 화산은 수원팔경에서도 ‘화산두견’으로 소개되고 있다. 융·건릉은 정조대왕(건릉)과 그의 부친이 사도세자(융릉)가 영면하고 있는 곳이다. 오래된 소나무와 능역에 내린 백설이 장관을 이룬다.

화성팔경 중 ‘융건백설’. (사진=화성시 포토갤러리)
화성팔경 중 ‘융건백설’. (사진=화성시 포토갤러리)

제2경 ‘용주범종’은 저녁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용주사의 경관이다. 김수복 시인은 ‘모란이 지는 종소리’라는 시에서 용주사 저녁범종을 이렇게 노래했다. ‘화성 용주사 저녁 범종은/가슴 깊이 숨을 들여 쉬었다가/멀리 몸속 항아리들을 내보내는데/아랫마을 사람들 둥근 가슴에까지/소리의 뿌리를 담아 재워서/뜰 앞 모란이 지는/그 슬픈 미소에/그 얼굴을 갖다 대어 보네’

제3경 ‘제부모세’는 하루에 두 번씩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드러내는 길이다.

제4경 ‘궁평낙조’는 궁평리 해안유원지의 백사장과 해송들이 어우러진 가운데 맞이하는 일몰의 순간으로 화성팔경의 백미로 평가된다. 특히 저녁노을을 뒤로 어선들이 궁평항으로 들어오는 장관은 넋을 잃게 한다.

제5경 ‘남양황라’는 광활한 남양 간척지의 가을 황금벌판을 일컫는다.

제6경 ‘입파홍암’은 우정읍 국화리에 있는 섬 입파도의 붉은 기암괴석과 파도와 갈매기가 어우러진 풍경이다.

제7경인 ‘제암만세’는 3.1만세 운동이 벌어진 제암리 교회와 순국기념관이다.

제8경 ‘남양성지’는 자연경관과 건축물이 아늑한 기운을 주는 남양성모성지를 말한다.

화성팔경 중 ‘궁평낙조’. (사진=화성시 포토갤러리)
화성팔경 중 ‘궁평낙조’. (사진=화성시 포토갤러리)

모두 팔경에 선정될 만하다. 이 가운에 내가 자주 가는 곳은 남양성모성지와 궁평항이다. 제암리도 자주는 아니지만 몇 해에 한번 씩은 들른다.

제부도는 최근 가보지 못했다. 케이블카가 개통되고 반드시 방문하겠다고 벼르고 있지만 차일피일 아직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제부도를 처음 방문했다. 물이 빠진 후 드러난 길은 신비로웠다. 걸어가는 내내 꿈을 꾸는 듯 몽롱했다. 섬 서쪽의 해송 숲도 환상적이었다.

텐트 안에서 2박을 했고 비록 모기들 극성에 잠을 못 이루었지만 제부도는 그때부터 근거리여행의 1순위가 됐다. 지금은 수원 시내버스가 제부도 입구까지 가지만 예전엔 시외버스를 타고 가야했다. 매화리에 있는 서신터미널이 버스 종점이었다.(시외버스 운행이 중지되면서 서신터미널은 기능을 상실해 버스 차고지로 이용되고 있다)

삼복 무더위에 거기서부터 걸어서 제부도에 갔다. 텐트며, 담요, 쌀, 김치, 라면, 양은솥까지 짊어진 채로.

그래도 즐거웠다. 여름이면 늘 제부도에 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서쪽 해변의 그 아름답던 해송숲이 사라지고 대신 음식점과 모텔, 유흥업소들이 들어섰다. 섬을 관광지로 만들겠다는 지역민들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해송숲이 파괴됐고 내 추억의 장소도 사라졌다.

그리고 차츰 발길이 뜸해졌다.

이러던 차에 화성팔경이 제정됐고 당연히 제부도 들어가는 노둣길도 팔경 중 하나로 선정됐다. 바다 갈라짐 현상은 그 까닭을 알고 있어도 언제나 신비하다.

화성팔경 중 ‘제부모세’. (사진=화성시 포토갤러리)
화성팔경 중 ‘제부모세’. (사진=화성시 포토갤러리)

그런데 ‘제부모세’라니....제부도 바닷길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다고 해서 그렇게 지은 것 같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 ‘약속의 땅’으로 가던 중, 여호와의 힘을 빌린 모세가 홍해바다를 가른 사건이 성경에 기록돼 있다.

그런데 여기는 홍해바다가 아니며 화성 지역주민들도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다.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는 신비의 바닷길’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란 홍보문구는 외국 관광객을 끌어 올 수 있으므로 시비를 걸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런데 팔경에 ‘모세’란 이름이 들어간 것은 생뚱맞다고나 할까? 어울리지 않는다.

화성시 제부도 뿐 아니라 서산시 웅도와 진도군 회동리 앞바다 모도 역시 썰물 때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길이 열린다. 진도군에서도 진도팔경에 이 장관을 포함시켰다. ‘신비의 바닷길’이다. 정 이름 짓기가 어려웠으면 이렇게 쉬운 우리말로 지어도 될 것을...

화성시 제부도나 진도군 회동리처럼 밀물 때는 물속에 잠기지만 썰물에 드러나 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노둣길’이라고 한다. 육지와 섬, 또는 섬끼리 잇기 위해 갯벌 위에 돌을 놓아 걸어 다닐 수 있게 만든 길이다.

‘제부모세’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보다는 차라리 ‘제부도 노둣길’이라고 하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나머지 7경도 어려운 한자 대신 진도군처럼 모든 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시 이름 지으면 좋겠다. 수원시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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