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심각하게 경계하고 있듯 올해 2023년 2분기에 우리 인구가 2만 7272명 감소하였고, 출생률도 0.70명에 불과하였다. 중소 도시의 인구가 날로 줄고, 읍면 중심 농촌 인구도 그러면서 노령화돼가고 있다. 지난봄에 영(嶺)을 넘어 오래 만에 대낮에 고향에 갔는데, 마을 가운데 지점에서 두 시간 가까이 오가는 주민을 한 분도 볼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골목으로 참새들처럼 내려앉던 처마 낮은 집 식구들의 도란도란 대화 소리, 웃는 소리, 놀리는 소리, 아기 칭얼거리는 소리와 엄마가 달래는 소리,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미소를 교환하거나 고개 숙여 인사하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시인은 자신의 시에 당대의 풍경을 어떤 방식으로든 반영하기 마련이다. 삶의 이야기에 환경과 이웃과 세태가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시는 픽션(Fiction)이고 역사는 넌픽션(Nonfiction)이라며, 이 둘을 그렇게 즐겨 대조하며 차이를 주목하지만, 우리가 느끼고 있듯, 이 대조의 경계가 선명하지 않다. 시에 제재로 등장하는 사실이나 사건이, 일어났었거나 일어날 개연성이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또 시인이 실제로 겪은 사실일 수도 있다.(그렇더라도 시에서라면 우리가 굳이 넌픽션이라 하지 않지만) 새삼 이런 점검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현실의식과 감각에 어울리며 공감과 공명을 자아내는 시에서 만나는 사실에서 우리는 더 이상 픽션이냐 넌픽션이냐 굳이 따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 시는 오늘 그 농촌 현실의 한 국면을 어느 르포보다 잘 환기시켜 준다. 농촌에 거주해서 알거나 들렀다가 알았고, 또 매스컴의 사진이나 관련 기사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구체 정황을 겪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다. 우리는 시인 덕분에 어느 한가한 농촌 오일장 장터 한가운데에 실제로 설 수 있다.      

 

풍산 오일장

동생이 언니를 만났다

뻥튀기 기계 곁에서

남편은 없고

서로 이 없는 시어머님만 남아 

설 쇠고는 처서에 처음인데

어지간히 웃기만 하다가

언니가 먼저 군입거리 챙겨

자리를 뜨는데

 

그 오랜 말

- 가니껴

                            - 「달팽이 38」/이철

 

 2023년 현재 시점에서 시인이 주목한 두 여인이 이채롭다. 사연도 그렇지만, 그들을 주인공으로 부각하다니 말이다. 소읍을 대처로 삼아 그 장날 장터에 일 년에 두세 번 출현하는 60대 가량 두 여인, 오늘 우리들이 주목하기 어렵거나 우리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여인에게 인사하거나 말 걸지 않고 그저 관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화자는 두 여인을 알기는 하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다. 그녀들의 주요 신상(身上)을 꿰고 있는 걸로 보아서는 뻥튀기장수 옆에서 자리를 펴는 장사치인건가. 하여간 ‘남편은 없고/서로 이 없는 시어머님만 남아’란 언급은 그들의 처지를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게 환기시켜 준다. 우리는 화자가 두 여인에게 무심한 듯해도 진작부터 깊은 동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두 여인의 깊고 절실한 동병상련(同病相憐)도 헤아릴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들의, 남편 없는 쓸쓸한 빈 집과 시어머니 노파의 허술한 빈 잇몸을 떠올리며, 그 공허에 심금이 째릿 감전(感電)된 듯하다. 그리고 봉양(奉養)하는 두 여인 너머로 오늘 우리에게 일상화된, 쉽게 이어지는 노인들의 요양원행 대열이 떠오를 것이다.    

 시는 한 경지 더 나아간다. ‘설 쇠고는 처서에 처음인데/어지간히 웃기만 하다가’ 언니가 그곳을 막 떠나가자, 동생은 겨우 ‘가니껴’라고 한마디. ‘가니껴[갑니까]’, 이 말은 작별 인사이다. 묻는 말이 아니다. 묻는 말 형식이지만, 상대를 존중하며 상대의 그 가는 행동을 인지하였다는 표시와 아울러 상대 대신 말하는 말이다. 그리고 ‘니껴’는 단순한 사투리의 하나가 아니라, 윗사람에게만 쓰는 존대어미로 상대를 받드는 예의가 내포되어 있다. 또 ‘쪼매[좀] 더 있다 가시지 하마 가시느냐’는 아쉬움도 묻어있다. 그러니까 ‘가니껴’는 이 지역의 오랜 유학의 공경(恭敬) 문화가 빚은 특유의 전통 언어. 

 독자들의 감상을 도리어 방해하는 우문(愚問)이 되겠지만, 그래도 한번 중얼거린다. 반년 만에 기약 없이 만난 두 여인은 왜 서로 헤어질 때까지 말없이 그저 웃기만 하였나? 말이 없었던 건 반복되고 같기도 한 신세타령을 절제한 성숙의 침묵이었나. 웃음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반가운 상봉과 평소의 정리(情理)를 제대로 드러내는 표징이었나. 아니다아니다, 그 이상이 아닐까. 같은 운명을 다시 서로 깊게 이해하고 유연하게 긍정하는 그 승화의 표시였나.   

 이 시의 무대 ‘풍산’은 경북 안동시 풍산읍(豊山邑)일 테고, 풍산읍이면서도 동시에 같은 성격과 사정에 놓인 오늘 한국의 소읍(小邑)과 그 주변 농촌 지역을 대리하는 제유(提喩)이다. ‘풍산 오일장’도 마찬가지. 농촌 일대의 삶과 풍경은 지난 왕조 시대뿐만 아니라, 20세기 시들에서도 계속 다루어져 왔다. 2, 30년대 KAPF의 관련 시들이 있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신선하게 읽히고 있는 김상용(1902-1951)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1934)와 신경림(1936-  )의 「농무」(1971) 등이 있다. 이 시는 그 이후 산업화 도시화 시대를 이윽히 거쳐 출현한, 출현할 수밖에 없는, 21세기 농촌의 오늘을 다룬 주요 시의 하나가 될 것이다.  

사족 : 작중에서 두 여인의 관계를 ‘동생’ ‘언니’라고 하였는데, ‘가니껴’로 알 수 있듯, 친자매는 아니다. 하지만 친자매보다 더 가까운 사이. 도시에 사는 독자들이, 두 여인의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가 아니더라도 이 시를 읽고 가슴에 차오르는 모종 정서를 소중히 여겼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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