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특히 우리 젊은 시인들의 시에 이전 세대 시인들의 시보다 대체로 어려운 경향이 지속되고 있는데, 내부 필연성을 기준으로 성찰과 절제가 요청된다는 두 비평가의 점검에 동의하면서도 시가 다른 문학 장르보다 언어예술을 지향하기에 우리 독자들은 시의 여러 비유와 상징과 알레고리, 그리고 그 복합과 착종도 어느 정도 양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언한 바 있다. 사실 필요 없는 조언이었지만, 감상과 음미는커녕 도대체 어렵고 재미도 없어 왜 굳이 시간을 내어 시를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주변 독자들의 계속되는 불만을 거듭 시인하고 또 시를 향유하고 싶다는 취지로 수용하면서도, 시가 설명을 위주로 하다보면 시의 매력이 메마르기 쉬워, 애매모호성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는 충언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양 떼가

대양을 건너 사막을 향해 가고 있다

휘어진 파도 등허리 푸른 물거품을 뜯어 먹으며 

딸랑딸랑 방울 소리 밤바다에 메아리친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아무리 세어도

양은 줄어들지 않고

불타는 사막 모래언덕에 나 홀로 비스듬히 누워

끝없이 바다 건너오는 양들을 헤아리고 있다

                                            「불면」/남진우

 

 제목을 읽지 않았거나 읽었어도 한번 고려하지 않고 이 시 본문만 읽었다면 이 시 역시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시종 애매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시의 제목 「불면(不眠)」으로 하여, 본문 진술 이면(裏面)에 병렬되는 내포와 그 전개를 대강 인지할 수 있다. ‘양 떼’, ‘대양(大洋)’, ‘파도’, ‘사막’ 등은 지시 대상이 생략된 환유들이고, 그 저의(底意) 검토에 우리가 유의하되 세밀할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다. 큰 바다, 그 파도의 푸른 물거품을, 목초지의 풀을 뜯듯 뜯어먹으며 건너오고 있는 ‘양 떼’, 그리고 ‘끝없이 바다 건너오는’ 그 ‘양 떼’를 ‘불타는 사막 모래언덕에’ ‘홀로 비스듬히 누워’ ‘헤아리고 있’는 ‘나’가, 벽화 같은 이 시에서 부조(浮彫)된 감상의 핵심이다. 

 먼저 무엇보다도 1행에서 단독으로 내세워진 ‘양 떼’가 문제일 것이다. 상징에 가까운 이 환유의 대상을 무엇으로 여기든 독자의 몫이다. 정답은 없다. 시인이 의도한 무엇이 명백히 있다고 하더라도 시인은 흔쾌히 독자들에게 양보해야 할 의무가 있고, 내심 좋아할 것이다. 의미와 의의의 다양화야말로 시인과 시가 독자에게 바라는 최상의 성취 아니겠는가.[모든 시는 김춘수의 「꽃」의, 다음 소망을 갈망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 독자들의 해석과 감상에서 그 궁극은 그럴듯한, 아니 일리 있는 새로운 의미와 의의 부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각설하고, 이 시에서 ‘양 떼’를 이중성을 지닌 우리의 일상의 사물이나 우리의 일반 행위로 추정하면 어떨까 한다. 기존 인식대로 한편으로 순(順)하고 선(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逆)하고 악(惡)한 것. 그래서 화자는 불면의 밤을 겪고 있지 않겠는가. 또한 그래서, ‘아무리 세어도/양은 줄어들지 않고’라고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긴긴 불면의 사연과 시간을 토로하고, 하필이면 자신이 ’불타는 사막 모래언덕’에 있다고 하며, 또 ‘물거품’, 그렇다 하필이면 ‘물거품을 뜯어 먹’으며, 무자비한 인해전술처럼 ‘양 떼’가 ‘끝없이’ ‘대양(大洋)’을 ‘건너’ 이 ‘사막’으로 밀려오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즉, 이 시에서 ‘양 떼’는 우리가 관행으로 인식하던 속성도 있지만 다른 속성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작중 정황을 ‘불면의 기록’이라기보다는 ‘불면의 꿈’으로도 볼 수 있다. 우선 보기에 정체가 모호한 작중 이미지들은, 프로이드의 소견대로 억압된 의식과 욕망의 비유인 꿈과 같지 않은가. 다시 말해 이 시는 시인이 지은 환유 중심의 알레고리라기보다 시인이 불면에 시달리다 꾼 불면 관련 꿈을 간결하게 정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각도에서 7행 ‘나’도 주목된다. 서정시에서 화자의 일인칭 자칭(自稱)인 ‘나’는 생략하기 쉽고, 이 시에서도 생략해도 무방하며, 이런 저런 이유로(특히 시인이, 독자들이 화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접근을 제어하려고) 굳이 ‘그’로 대체하는 사례도 꽤 있다. ‘나’를 7, 8행의 주어이며, 화자의 자아와 자의식이 보통 이상이라는, 불면 형상화의 작은 표징 제시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러니까 화자가 꿈에서 본 이상한 자신의 모습, 그 모습의 자연스러운 기재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 ‘나’는 ‘홀로 비스듬히 누워’라고 묘사되고 있는데, 이 상태 서술은 일종의 객관화에 해당하며, ‘끝없이 바다 건너오는 양들을 헤아리고 있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 같은 맥락에서, ‘나’가 직면한 상황은 제시되지만 ‘나’의 어떤 생각 의지 기분 등은 토로되지 않는다는 국면도 주목할 만하다.  

 이런 쇄말 추정을 시도하는 건 다름 아니라, 새삼 비유와 알레고리가 적용된 시는 꿈과 유사하다는 주장을 독자 여러분께 알리고, 이 시를 살피며 같이 환기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에서 환유와 상징과 알레고리는 일종의 허용된 은폐라고 할 수 있고, 시를 독해하면서 우리는 ‘해몽(解夢)’, 어느 정도 집중과 진단과 모색이 요구되는 ‘해몽’을 연상할 수 있다. 우리는 삼쾌(三快), 즉 쾌식, 쾌변, 쾌면을 건강의 조건으로 알고 있는데, 불면은 삶의 한 조건이겠다. 잠들지 못하는, 숙면하지 못하는, 자주 깨 뒤척이는 밤. 끝없이 이어지는 듯 황막(荒漠)한 불면이여. 하지만 불면은 우리의 정신만이 아니라 몸의 노쇠와도 관련된 자연스러운 현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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