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화홍문화제(華虹文化祭)’로 시작된 수원화성문화제 

어린 시절부터 수원화성문화제를 지켜봤다. 직접 참여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이 행사 백일장에서 시 부문 장원을 했고 그 후 이 백일장 심사위원을 수십 년 간 한 적이 있다. 사단법인 화성연구회 회원들과 정조대왕 능행차 행렬에 조선시대 군사복장을 하고 지지대고개부터 융릉까지 참여하기도 했다. 낙성연 행사 때 수원화성 축성의 주역 조심태 역을 맡아 무대에 올랐다. 수원화성문화제 현장에는 늘 내가 있었다.

그때 명칭은 ‘화홍문화제’였는데 프로그램이라고 해봤자 고작 개막식, 각 고교 밴드부 퍼레이드, 운동장에서의 개막식과 약식 능행차 연시, 미술대회나 백일장, 무용학원 어린이들의 발표회 정도에 그쳤다.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연등행렬과 함께 펼쳐지는 각 고교 밴드부들의 ‘경쟁적 행진’이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정성을 들여 닦은 악기를 연주하는 이 행렬이 팔달문 부근을 지나갈 때면 남녀학생들이 나와 꽃을 전해주고 종이테이프를 목에 걸어주는 등 축제분위기가 고조됐다. 

이제 세월이 흘러 팔달로를 행진하던 학생들과 꽃을 주던 소년소녀들은 중년을 지나 노년의 나이로 접어들었지만 그들의 추억 속에선 아직도 소년 소녀들이리라.

1964년 제1회 화홍문화제 장면. 고교 밴드부가 팔달로를 행진하고 있다. 뒤로 ‘경기도청사 기공’ 홍보구조물이 보인다. (사진=수원시)
1964년 제1회 화홍문화제 장면. 고교 밴드부가 팔달로를 행진하고 있다. 뒤로 ‘경기도청사 기공’ 홍보구조물이 보인다. (사진=수원시)

수원화성문화제는 1964년 ‘화홍문화제(華虹文化祭)’로 시작됐다. 1964년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전한 경기도청 청사 신축 기공식을 했던 날인 10월 15일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다. 

1996년에 고 안익승 선생이 펴낸 책 ‘수원의 맥’에 따르면 축제 이름으로 경기, 수원, 팔달, 화홍 등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또 ‘문화제’로 할 것인지 ‘예술제’로 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단다. 논의 끝에 수원화성의 가장 아름다운 시설물이자 상징물인 화홍문으로 결정했다는 것.

1971년 화홍문화제가 열린 수원공설운동장에서 여고 밴드부가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수원시)
1971년 화홍문화제가 열린 수원공설운동장에서 여고 밴드부가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수원시)

그러나 당시 화홍문화제는 매력적인 축제가 아니었다. ‘화홍문화제 및 시민의 날 기념식’과 팔달문 타종, 각 학교 밴드부의 시가행진, 불꽃놀이 정도였다. 공설운동장이나 팔달문 주변에 살지 않는 시민은 행사가 열리는지조차도 모르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게다가 예산낭비라며 불꽃놀이마저 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1977년 10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문화제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문화‧예술적인 성격이 부족할 뿐 아니라 단순한 놀이행사만 치러지는 유흥적 행사”라면서 가마 대신 지프차가 나와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넓은 운동장에서 윷놀이와 씨름 대신 ‘빅토리’와 ‘파이팅’이 연발되는 축구와 배구 경기가 벌어져 차라리 ‘시민의 날’로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예산 부족으로 이전 행사를 답습하고 뚜렷한 고증 없이 막연한 추정만으로 행사를 진행된다는 것, 관주도로 진행한다는 점 등을 짚었다. 

따라서 오랫동안 시민들의 호응도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볼거리, 즐길 거리가 없는 그렇고 그런 관변행사였다.

1980년대부터 축제 규모 확대, 내용도 픙성 

축제의 규모가 확대된 것은 1980년대부터다. 내용도 다채로워졌다. 지역문화예술인들의 참여로 화성문화제는 종합예술제로 한 단계 성장했다. 특히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때에는 더욱 풍성해졌다.

첫날 화산릉 참배, 수문장 연시, 제등행렬, 팔달문 동종 타종, 불꽃놀이, 웅변대회, 화홍의 밤을 시작으로 경축식, 능행차연시, 매스게임, 효자효부상(화홍상-전국 효자효부상) 수상자 카퍼레이드, 민속경기, 라디오 공개방송, 종합예술제, 국악의 밤, 한글백일장, 한시백일장, 미술실기대회, 경축음악회, 작품전시회 등 수많은 문화 행사들이 3일 동안 행해졌다.

이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떤 행사는 사라졌고 어떤 행사는 보강됐다. 사라진 행사는 웅변대회, 매스게임, 효자효부상 카퍼레이드, 라디오공개방송, 종합예술제, 국악의 밤, 한글백일장, 미술실기대회 등이다. 대신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지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리축제로 거듭났다. 

화성문화제가 오늘날처럼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심재덕 시장 임기 중인 1996년 ‘수원화성 축성 200주년’을 맞은 제33회 화홍문화제부터였다. ‘화성성역의궤’에 나와 있는 수원화성 준공일인 9월 10일(음력)을 양력으로 환산, 10월 10일 전후로 정했다. 1997년 12월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문화제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됐고 1999년부터는 축제 명칭도 수원화성문화제로 바꿨다. 이 무렵 수원갈비축제를 포함한 음식문화축제, 정조시대 장용영 무사들의 무예를 바탕으로 한 야조(夜操)공연, 화성축성체험, 시장거리축제 등도 본격 시작됐다.

그 중심에는 수원문화원장에 이어 민선 1기 시장에 당선된 심재덕 시장이 있었다. 수원화성 축성 200주년인 1996년에 특히 정조대왕 능행차를 본격적으로 재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 백 명에 불과했던 행차 인원규모를 수 천 명으로 확대하고 말도 수 십 필 투입시켰으며 행차 거리도 지지대고개부터 화성시 융릉까지 연장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수원문화원 수원지역문화연구소 주최로 지난 12일 화성박물관에서 열린 ‘수원화성문화제 60년-60년의 어제에서 내일의 길을 찾다' 학술대회에서 김우영 필자가 발표한 기조강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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