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부성조도(華城府城操圖). 1795년에 작성됐고 육군박물관에 소장됐다, 수원화성의 축성과정과 방어 전략을 살펴볼 수 있는 지도. 어제성화주략에 3600보로 계획됐으나 100보가 늘어난 3700보로 기록됐다. 검은색은 성곽이 쌓인 부분이고, 붉은색은 아직 쌓지 않은 구역이다. 완성된 모습과는 많은 부분이 상이하다. (자료=수원시)
화성부성조도(華城府城操圖). 1795년에 작성됐고 육군박물관에 소장됐다, 수원화성의 축성과정과 방어 전략을 살펴볼 수 있는 지도. 어제성화주략에 3600보로 계획됐으나 100보가 늘어난 3700보로 기록됐다. 검은색은 성곽이 쌓인 부분이고, 붉은색은 아직 쌓지 않은 구역이다. 완성된 모습과는 많은 부분이 상이하다. (자료=수원시)

수원에 성곽을 쌓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1790년 6월 10일(정조14) 부사직 강유의 상소로부터 시작됐다. 수원을 군사적 요충지로 만들고 사도세자의 원침을 수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읍성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강유의 상소가 있은 후 8일이 지난 6월 18일 순조가 태어났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1년 1월 22일(정조15) 사직 신기경이 “수원의 부흥책과 도성방위를 위해 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에 정조는 신읍에 성곽을 축조하기로 결심한다. 정조는 성곽축조계획 수립을 정약용에게 지시했다. 다산이 수립한 기본계획을 받아들여 ‘어제성화주략(임금이 작성한 화성기본계획서)’으로 발표하게 된다. 

이 계획서는 규모에 관한 내용과 재료에 관한 내용 등 여덟 가지 사항을 제시했다. 성의 규모는 3600보 높이는 2길 5자를 제시했다. 이후 정조가 1794년 1월 14일 수원에 행차하여 성터를 살펴봤다. 터를 잡기 위해 설치한 표지인 기표(旗標)가 북리(北里)의 인가를 꿰뚫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는 인화(人和)를 해치는 것”이라 했다. 

정조는 성을 더 뒤로 물려서 성터를 정할 것을 지시하여 표를 세우니 이는 마치 유천의 모양인 버들잎 모양을 본뜬 구불구불한 모양이었다. 그 결과 성의 둘레가 3600보에서 4600보로 늘어나게 됐다.

재료에 관해서도 어떤 재료로 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벽돌로 쌓을 경우 기술부족은 물론 땔감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이 있었다. 흙으로 쌓을 경우 견고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어 결국 돌을 재료로 하는 석성으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결정은 현륭원과 신읍건설을 담당했던 수원부사 조심태의 경험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공석면 숙지산의 2곳, 여기산 2곳, 권동에서 돌맥을 찾았다. 또 팔달산에서 성터를 닦던 중 왼쪽 산등성이에서 석맥을 발견했다.

이렇듯 성역 착공 1개월 전에 공석면의 숙지산과 여기산에서 돌맥이 발견되자 채제공은 “신(神)은 항상 신명(神明)이 이를 감춰두었다가 오늘을 기다린 것은 모두가 전하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당시의 감격을 정조께 아뢰었다.

숙지산 부석소. 현재 화서역벽산블루밍아파트 단지내 전망대 부분 숙지산 부석소 2개소 중 한 곳이다. 1970년대 초까지 석산으로 운영됐다. 1978년 화서주공아파트가 지어졌다가 2010년 화서역벽산블루밍아파트 단지로 재건축됐다. (사진=김충영 필자)
숙지산 부석소. 현재 화서역벽산블루밍아파트 단지내 전망대 부분 숙지산 부석소 2개소 중 한 곳이다. 1970년대 초까지 석산으로 운영됐다. 1978년 화서주공아파트가 지어졌다가 2010년 화서역벽산블루밍아파트 단지로 재건축됐다. (사진=김충영 필자)
여기산 부석소. 1960년대말까지 석산으로 운영됐다. 1990년대 전경대 사격장으로 쓰이다가 전경대 막사로 이용되고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여기산 부석소. 1960년대말까지 석산으로 운영됐다. 1990년대 전경대 사격장으로 쓰이다가 전경대 막사로 이용되고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권동 부석소. 1970년대 초까지 석산으로 운영됐다. 1990년대 화서영광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사진=김충영 필자)
권동 부석소. 1970년대 초까지 석산으로 운영됐다. 1990년대 화서영광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사진=김충영 필자)

축성을 위해 채취한 돌의 숫자는 숙지산에서 8만1100덩이, 여기산에서 6만2400덩이, 권동에서 3만200덩이, 팔달산에서 1만3900덩이 등 합계 18만7600여 덩이였다. 

석맥이 발견되자 실제로 일할 장인들을 확보해야 했다. 당시 장인이 일하는 곳은 정부기관에 소속된 관장(官匠)과 민간신분의 사장(私匠)이 있었다. 

1793년 12월 6일 비변사에서 한양의 각급 관청인 장용영,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수어청, 용호영, 총융청, 내수사, 선공감, 상의원, 공조, 중부,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와서(瓦署)에 화성성역이 시작되니 해당석수를 다른 곳에 보내지 못하게 공문을 보냈다. 

화성성역은 1794년 1월 7일 돌 뜨는 일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공사가 진행됐다. 화성축성공사는 화성성역소에서 372명과 22개 직종 장인 1821명, 전체 2193명이 참여했다.

화성성역 중 가장 비중이 많은 분야는 성벽을 쌓는 일이었다. 

돌 관련 일은 부석소(돌 뜨는 장소)에서 돌 뜨는 일과 돌을 다듬는 일, 돌을 운반하는 일, 성벽을 쌓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체 장인 1821명중 석수가 642명으로 35.2%를 차지했다. 

석수 642명의 출신지를 살펴보면 서울에서 209명이 참여했는데 이중 기관에 소속된 관장이 153명, 사장이 56명이다. 경기도에서 173명, 충청도 53명, 강원도 17명, 황해도 74명, 전라도 41명, 경상도 23명, 평안도 52명이 참여했다. 서울과 경기도에서 381명(59%)의 장인이 참여했다.

성돌은 크기에 따라 가격이 정해졌다. 큰 성돌은 뒷길이가 3자 5치에 한 변의 길이가 2자인 경우 8전, 중간돌은 길이가 3자에 한 변이 1자 8치인 경우 5전, 작은성돌은 길이가 2자 8치에 한 변이 1자 5치인 경우 3전으로 정해졌다. 

성돌 외에 특수한 용도의 선단석(扇單石)은 크고 네모반듯한 돌로 큰 선단석은 길이 5자 2치, 너비 4자 1치, 높이 4자인 경우 15냥이었다. 또 값이 많이 나가는 돌로 아치에 쓰이는 홍예석으로 길이 5자 1치, 너비 2자, 높이 2자 7치로 값이 12냥이었다.

화성성역의궤는 채취장소별 돌의 특성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숙지산돌은 강하면서도 결이 가늘고, 여기산 돌은 부드러우면서 거칠고, 권동의 돌은 여기산과 같지만 결이 조금 더 가는 특성이 있고, 팔달산의 돌은 숙지산에 비하면 더 강하고 여기산 보다는 더 거친 속성을 지녔음을 적고 있다 .

갑인년(1794년) 1월 7일 돌 뜨기를 시작으로 수원화성 공사가 착공됐다. 화성을 만드는 일은 당초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여러 부분에서 성과급제를 도입하고, 돌의 채취 운반 등에 대해서도 규격을 정하여 단가를 정함으로써 공사기간을 단축하는 요인이 됐다. 

화성을 만드는 기간은 34개월이 걸렸는데 중간에 6개월을 쉬었으므로 실제 공사에 소요된 기간은 28개월 만인 1796년 9월 10일 완료됐다. 

화성기적비. 1991년 11월 수원시가 장안공원에 세웠다. 비문은 정조의 명으로 봉조하 김종수가 지었다. 글씨는 화성성역의궤 글(정리자)을 집자했고, 화성기적비명 제호는 소형 양근웅 선생이 전서체로 썼다. (사진=김충영 필자)
화성기적비. 1991년 11월 수원시가 장안공원에 세웠다. 비문은 정조의 명으로 봉조하 김종수가 지었다. 글씨는 화성성역의궤 글(정리자)을 집자했고, 화성기적비명 제호는 소형 양근웅 선생이 전서체로 썼다. (사진=김충영 필자)

‘화성기적비문(華城紀蹟碑文, 화성을 만든 연유를 적은 비문)’을 작성한 김종수는 “이는 신의 도우심도 있었지만, 정조의 신묘한 계획과 묘한 운영방법이 보통의 만 갑절이나 뛰어났음” 이라고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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