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던 날 점심 때 뭘 먹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사)화성연구회 ㅇ이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ㅇ이사는 나보다 두어 살 아래지만 생각의 결이 비슷한 술벗이다. 날씨도 그런데 한잔 하자는 것이다. 소개시켜줄 사람도 있다고 했다.

나는 낮술을 하지 않는다. 대낮부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술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중늙은이를 누가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겠는가. 물론 기자노릇을 하던 젊은 시절엔 낮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신문사의 편집국장과 부장급 기자, 경기도지사, 도청의 국장급들이 함께 한 점심자리가 술자리가 되어 밤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기 싸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기 싫어하는 기자 근성이 작동, 꼿꼿하게 잔을 주고받았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30여 년 전 이야기다.

수수한가 야외 공간. (사진=김우영)
수수한가 야외 공간. (사진=김우영)

좋은 집을 발견했다며 호들갑을 떤 ㅇ이사가 안내해준 집은 행궁동길 일명 ‘행리단길’이라고도 불리는 신풍동 ‘수수한가’였다.

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집의 칼국수와 막걸리 ‘수수한주’, 그리고 안주 몇 가지는 먹어본 적이 있다. 인터넷 맛카페에서 알게 된 동갑내기 친구 ㅂ이 이집 막걸리가 좋다고 해서 함께 마셨다.

칼국수도 맘에 들었다. 수제비도 이집의 대표 음식인 것 같은데 수제비를 좋아하지 않아 맛을 보지 못했다. 수제비는 어렸을 때 질리도록 먹어서 지금도 싫다. 죽도 그렇다. 돼지고기 비계는 어렸을 때 먹다 체해서 입에 대지 않는다. 비계를 뺀 돼지고기 순살은 먹는데 그나마도 군대 가서야 먹기 시작했다.

오늘은 비도 오기에 낮술 한잔하기로 했다. 애절한 아우의 눈길을 계속 피할 수도 없었고 수수한가 김미전 대표도 합석했기 때문이다. 자칭 막걸리 맛 감별사인 내가 술에 대한 평을 해주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일산 호수공원에서 열린 대한민국 막걸리축제에 가서 참가한 전국 양조장의 막걸리를 모두 시음해봤다. 그리고 상주 은척양조장, 괴산 제일양조장 등 막걸리 양조장을 순회하기도 했다. 

수수한주를 만드는 사람까지 함께 했으니 이젠 평을 해줄 차례다.

수수한주의 맛은 맑고 시원하며 깔끔하다. 생목이 올라오지 않는다. 뒷맛이 개운하다. 단맛과 신맛의 균형도 좋다. 젊은이들도 좋아할 맛이다. 

사실 나는 약간 쿰쿰하면서 묵직한 막걸리를 좋아한다. 갓 나온 막걸리보다는 시어지기 직전, 상큼한 사과향이 올라오는 그 상태를 선호한다. 그러나 그런 막걸리를 마시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수수한주의 맛이 합리적이라고 느꼈다.

김미전 대표는 맛을 보시라면서 전통 삼양주 ‘수수미주’도 한 병 내왔다.

삼양주는 3번의 담금 과정을 거친 술이다. 한 가지 술을 여러 번에 걸쳐 나누어 빚는 술을 중양주라고 한다. 두 번 빚으면 이양주, 세 번 빚으면 삼양주다. 술 빚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도수가 높아지고 술 맛이 더 깊어지며 향이 좋아질 뿐 아니라 부드러워진다. 따라서 삼양주는 대량생산이 어렵고 높은 가격으로 판매될 수밖에 없다.

수수한가에서 만드는 ‘수수한주’와 ‘수수미주’. (사진=김우영)
수수한가에서 만드는 ‘수수한주’와 ‘수수미주’. (사진=김우영)

수수한가의 수수미주는 국내산 찹쌀과 쌀만을 사용해 만든 원주를 60일간 발효하고 숙성해 만들어낸 술이다. 

수수한가의 술잔은 와인잔과 같은 유리잔이다. 이거 참 맘에 든다. 나는 술집에서 개밥그릇 같은 알루미늄 양재기나 플라스틱 잔을 주면 반드시 유리컵이나 사기잔을 요구한다. 막걸리는 살아있는 술이다. 와인을 알루미늄 잔이나 플라스틱 잔에 주는 집이 있던가? 

유리잔에 담긴 술의 향이 참 좋다. 냄새를 맡고 천천히 한 모금 마신다. 일본이 자랑하는 사케 보다 더 낫다. 식전주로 한 모금 넘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 대표의 말에 의하면 취해도 시간이 지나면 아주 깨끗하게 술이 깨는 게 수수미주의 특징이라고 한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호불호가 없는 맛이다.

김대표는 “왜 비싼 돈을 주고 와인이나 사케 같은 외국 술을 들여와야 하는가, 우리도 좋은 전통술이 많은데 다른 나라 술을 선물해야만 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 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우리 술을 공부해보니 와인 주조과정과 비슷하더란다. 그들은 오크통에 우리는 항아리에 담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 

김 대표가 우리 술 빚기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그가 운영하는 음식점 수수한가도 2011년 동탄에서 시작해 2020년 행궁동 직영점을 열었다. 그해 수수한주 막걸리를 선보였고 2022년부터 약주와 증류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2023년엔 ‘수원양조 농업법인’도 설립했다.  

한잔만, 입술만 적시겠다고 시작한 낮술자리는 길어졌다. 

그의 꿈은 한때 수원의 대표 술이었던 ‘샛별소주’와 약주인 ‘용지대월’을 복원하는 것이란다. ‘샛별소’주는 내 기억에도 있다. 더운 여름날 동네 어른들은 사발에 샛별소주를 따라 마셨다. ‘크으’ 소리와 함께 붉은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안주로 먹는 모습을 보면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저 독한 소주를 매운 고추와 먹는 어른들이 이상했다.  

‘용지대월’은 심재덕 전 시장의 아이디어로 만든 술이다. 한때 수원시청의 모든 행사와 회식자리엔 반드시 용지대월이 등장했다. 다시 그 장면을 보게 되길 바란다. 

이로써 수원엔 막걸리 전성시대가 열렸다. 

광교산 보리밥집 자선농원을 운영하는 김정수 대표가 만드는 ‘휴동막걸리’와, 행궁동 행궁연가에서 수원양조협동조합(이사장 황현노)이 탄생시킨 ‘행궁둥이막걸리’, 그리고 수수한가 김미전 대표가 출시한 ‘수수한주’까지... 막걸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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