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다. 기존 권위의 순치 압력을 받다가 혼재된 부조리에 불편 불쾌 거부 타파하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가소성(可塑性)의 비전과 지향을 주장하면서, 실망과 희망으로 불안하던 시절. 그러면서 좌절하고 이루고, 이루고 좌절하면서 어느덧 그런 자신을 잊고... 자신과 가정과 사회에 계속 제기되는 문제, 다른 의사와 이해의 충돌, 그 해결과 비 해결의 연속. 저마다 저마다의 삶이 흐르고, 어느덧 누구에게나 처음이든 가끔이든 마지막이든 휴지와 성찰의 시기가 오고, 안정과 성취보다는 유감과 후회가 가슴에 더 고일 것 같다.

      

소주만 마신다는 게 자랑이었을까 

젊어서 한때는 맑고 독한 것 

명백한 것에 끌렸었다

맑고 독한 정신을 벼린답시고 칼을 갈듯 이를 갈며 마셨다

신들린 무당 작두 타듯 술잔을 물어뜯으며 

아슬아슬한 술상들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온 이곳은 어디인가 

언제나 그 자리

아우성치는 격랑에 에워싸여 눈을 못 뜨는 자리 

누구는 세상을 버리고 

누구는 술을 버린 자리 

꿇어앉아 두 손 모은 자도 있었느니

                                        - 「소주」/김홍성

 

 이제 아무래도 젊지 않은 현재, 지난 젊었던 시절의 자신과 자신의 삶을 회억하는 이 시. 화자처럼 ‘명백한 것에 끌’려 ‘소주만’을 ‘맑고 독한 정신을 벼린답시고 칼을 갈듯 이를 갈며 마셨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어도, 우리는 이 시에 이견을 가지기도 하겠지만 대체로 공감할 것이다. 젊은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듯.(젊은 독자도 나름대로 과거, 현재와 대비되는 다른 과거가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현인이 아니며,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자타의 존재성에, 스스로 완인(完人)이 되자고 기대한 적이 없었던가. 하지만 그러나, ‘아슬아슬한 술상들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온 이곳은 어디인가’ 이하를 읽으면, 우리도 ‘이곳’ 각성이 문득 심화되고 만추의 삭풍이 우리 가슴에서도 가슴을 에며 분다.  

 ‘아슬아슬한 술상들’. 어떤 술상들이었을까. 여러 국면이었겠지만 아마 뜨겁고 순수하여 누구라도 그 앞에서는 미진하고 부끄러울 언사로, 청산(靑山) 비수의 기백으로, 자칫 자신과 상대의 심장을 일거에 베어 동강낼 뻔한 자리였기도 하지 않았을까. 아니 팔 하나 다리 하나쯤은 자르고 말았을. ‘신들린 무당 작두 타듯 술잔을 물어뜯으며’ 마신 소주의 맑고 아찔한 독기에 도취되어, 또 그 기운에 지혈도 되고 소독도 되었을 듯한 자리. 

 그런데 이런 ‘아슬아슬한 술상들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온 이곳’이, ‘언제나 그 자리/아우성치는 격랑에 에워싸여 눈을 못 뜨는 자리’라니 말이다. 낙심천만 화자여. 같은 아우성에 시달리는 우리도 과거와 비슷한, 아니 더 시끄러운 현재가 아니라고 하기 어렵다. 이 시행이 결미일 수 있겠는가. 연관된 그 다음 사정과 회포를 우리 독자의 추정에 맡기면 곤란한데, 다행히 결미 3행이 이어진다. 유감천만 화자는 그러다가 불현 듯 우정 어린 옛 친구와 선배와 후배를 돌아보는 것이다. ‘누구는 세상을 버리고/누구는 술을 버린 자리/꿇어앉아 두 손 모은 자도 있었느니’. 

 그러고 보니 이 시를 특히 70, 80년대에 이 땅에서 청춘을 보낸 세대가 더욱 공감하며, 이제 좀 부드러워진 자신의 심금을 저마다 자신의 사연과 결로 연주할 것이다. 자신과 세계에 자신의 현재를 솔직하게 표백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한 기미도 배인 진정성의 율려(律呂)는 그때와, 또 화자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족 : 혹 이 시의 화자가 현재 ‘소주’를 멀리한다고 여길 독자들이 있겠는데, 그렇지 않을 것이다. 화자는 이제 자주는 아니겠지만 여전히 소주를 마시며 언제부턴가 맥주도 소맥도 마셨고 막걸리 포도주 위스키도 마시고 있을 것이다. 지속되는 ‘격랑’에 자신의 그 ‘명백’ 추구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책임도 있겠다는 아이러니 겸허의식이 행간에서 보인다. 이 시는 시행들이 간략하지만 함축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저마다 무척 길다. 깊고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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