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여름과 가을을 마무리하는 이 겨울의 정경과 운치는 아무래도 눈, 그 누구에게든 공평한 은총처럼 하늘 가득 소리 없이 분분 휘날리며 내리는 눈일 것이다. 아득한 공중에서 무수히 이어지고 이어지는 눈은 우리의 시선을 확대해 몰입하게 하고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 이 세속의 삶에서 자신으로부터 남으로부터 자신과 남의 관계로부터 어쩔 수 없이 입은 갖가지 상처와, 느닷없이 출현해 의식 한 구석에서 어슬렁거리는 옛 상흔의 그 잔상(殘像)도 몰각되면서, 우리는 그 이전 시원(始原)의 순수한 상태로 회귀할 수 있다. 그 소급 공간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유년 시절 보았던 눈 내리던 고향 마을. 다음 시의 ‘고향집 오는 눈은 추위를 모른다’는 시작은 그래서 조금도 어폐가 없고, 우리 모두의 공감을 자아내면서 그때처럼 무작정 설레게 한다. 그렇다. 눈도 펄펄 추위를 몰랐지만 어린 우리는 더 추위를 몰랐다.   

 

고향집 오는 눈은 추위를 모른다

고향집 눈발은 정이 많아 넘친다

고향집 눈밭은 어머니 품속이다

고향집 눈길은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다

고향집 대밭의 참새 떼는 사냥꾼이 오지 않고 

아이들 새총 맛도 몰라 

사는 재미 잃은 지 오래다

고향집 농기구는 녹이 슬고 낡아 해져 수집상들 집어가 사라지고

농기계는 부리는 농부들이 늙어가고 병들어 죽어나가 멈춰선다

고향집 지붕에 내려 쌓인 싸락눈은

어머니 요양원에 가신 뒤 

쉬이 녹지 않아서

고향은 서럽게 싸락싸락 그립다

 

새벽이 천천히 오는 곳에서

                           -「눈 내린 고향집」/정종배

 

 그렇다. ‘고향집 눈발은 정이 넘’쳐 감당할 수 없었고, 소복 내린 눈을 보며 멍하니 서있던  집안 채전(菜田)은 ‘어머니 품 속’ 같이 따뜻하고 시원하고 편안했으며, 그 ‘눈길’에서는 ‘넘어져도’ 통증을 감지하지 못하거나 않기에 ‘다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고향집 대밭의 참새 떼는/사냥꾼이 오지 않고/아이들 새총 맛도 몰라/사는 재미 잃은 지 오래다’를 읽으며, 우리는 어린 시절 우리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암벽 부처를 닮은 미소를 짓는다. 눈 쌓인 마을에서 떠돌이 사냥꾼들의 참새 사냥도 중지되고 아이들은 새총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해서, 그래서 ‘대밭의 참새 떼’는 ‘사는 재미 잃은 지 오래다’고 화자는 참새를 대신하였던 그 시절 말을 잊지 않고 반복한다. ‘오래다’는 우리 독자의 동정을 배려하지 않는 도약의 진술로도 들리지만 우리의 선행(先行) 동정을 화자도 의식하고 눈웃음 지으며 연통(連通)하는, 우리가 고개를 끄떡이며 허여하는 정다운 어조의 언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위기일발 순간에 일제히 날아올라 사냥꾼을 놀리며 흩어지면서 삶의 힘차고 짜릿한 역동성 희열을 누리다가 급기야 그러지 못하는 ‘참새 떼’도 슬며시 부각되며, 미묘하게, 우리는 이 시에서 펼친 즐겁고 유려한 독해 행보를 잠시나마 멈추고 말 수 있다. 게다가 ‘아이들 새총 맛도 몰라/사는 재미 잃은 지 오래다’를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도 현재 자신이 ‘새총 맛도 몰라/사는 재미 잃은 지 오래다’고 토로하는 것으로 들을 수 있다. 하여간 어떤 다른 예징도 내포되어 있지 않나 좀 의아하긴 한데, 아닌 게 아니라 그 다음 시행들에서 화자는 자신의 현재 고향의 쇠락한 모습으로 후퇴하며 이전과는 다르게 쓸쓸해 한다. 그래서 ‘사는 재미 잃은 지 오래다’는 이 시의 전후를 분기하면서도 접합하는 이중 장치이며, 한편, 과장이면서도 과장이 아니라고 하겠다. 

 아무튼 우리는 전환 이후를 어쩔 수 없이 다시 읽어야 한다. 마을의 ‘농기계’는 부모 같던 ‘농부들이 늙어가고 병들어 죽어나가 멈춰’섰고, ‘고향집 농기구는 녹이 슬고 낡아 해져 수집상들 집어가 사라지고’...... 아 이뿐인가. 고향집을 홀로 지키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녹이 슬고 낡아 해져 수집상들 집어가 사라’진 ‘고향집 농기구’처럼, ‘요양원’들이 ‘집어가 사라지고’...... 

 이제 따뜻하고 시원하고 편안한 ‘어머니 품 속’을 상실한 화자는 이제 눈 내리는 고향집을 생각하면 추워지는데, 그 ‘고향집 지붕에 내려 쌓인’ 눈도 ‘싸락눈’, 즉 ‘빗방울이 찬바람을 만나 얼어서 내리는, 아니 떨어진 알갱이 눈’이다. 화자는 그 ‘싸락눈’이 어서 녹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싸락눈’은 ‘쉬이 녹지 않’고, 그래서 울울한 심정이 길게 이어지는 가운데 ‘고향은 서럽게 싸락싸락 그립다’. 즉, 그래도 고향이 그립지만 이전과는 달리 심장이 뭉클하지 않고 따끔따끔하다. 제어할 수도 있지만 제어하고 싶지 않은 우수(憂愁). 밝고 가벼웠던 우리 독자의 심정도 이제 어둡고 무겁다. 이 시의 독립 결구, 화자가 고향집을 떠나 거주하고 있는 소재를 언급한 ‘새벽이 천천히 오는 곳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음미하게 하다가, 어느덧 화자와 같이 먼동이 느리게 트는 그 곳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한다. 

 오래 만에 만나는 ‘눈과 고향’의 시맥을 이은 이 시. 눈 내리는 겨울의 전통 서정과 오늘 농촌 고향의 고적한 모습을 반영한, 이전과 다른 이 시대의 ‘싸락눈 향수(鄕愁)’가 작품 밖으로 흘러나와 차고 작은 바람에 싸락싸락 구르며 ‘쉬이 녹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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