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마지막 날, 깨끗하게 목욕을 마치고 매향동에서 400번 버스를 탔다. 예년에는 연말에 ㅎ선생과 서산 부석사에 가곤 했는데 올해는 많이 바쁜가, 연락이 없다. 그래서 혼자 나선 길이다.

남양성모성지에서 내렸다. 남양성지는 가끔씩 혼자서 방문하는 곳이다. 잡생각을 정리하기 참 좋은 장소다.

남양성모성지. (사진=김우영)
남양성모성지. (사진=김우영)

성지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기 전 잠시 냇가로 내려가 꽁꽁 묶인 채 이 물을 건넜을 그 사람들을 떠올렸다. 병인박해 때 붙잡혀 배교회유와 협박, 죽음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형장을 향해 걷던 천주교 순교자들.

이 내를 건너면 이승과는 이별이다. 멀지않은 골짜기에서는 형을 집행할 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내 어찌 감히 그들의 마음 한자락이라도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내가 만약 그들이라면 죽음이 기다리는 형장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을까. 고문을 당하기 전 두려움에 떨며 미리 배교부터 하고 이웃과 사돈의 팔촌 이름까지 모두 줄줄이 토설하지 않았을까.

숙연한 마음으로 다리를 건너 성지로 들어섰다. 입구엔 공사가 한창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숲속 산책길(십자가의 길)과 새로 지은 대성당이 있어 마음은 고요해진다. 때마침 대성당 두 개의 탑 사이에 걸린 7개의 종이 울린다. 종소리는 맑은 하모니를 이루며 골짜기에 울려 퍼진다.

성지 입구엔 초를 봉헌하고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장소가 있다. 비록 수 십 년 냉담자이긴 하나 유리컵 초를 한 개 구입해 불을 붙인 후 정성을 다해 기도를 바쳤다.

첫 번 째 기도는 출산이 임박한 셋째 딸 영경이와 아기의 건강이었다. 혼인한지 8년 만에 낳는 아이라 양가의 기쁨이 매우 크다. 우리 가족 모두의 건강과 평화도 기원했다.

남양성모성지에서 초를 봉헌하고 기도를 올렸다. (사진=김우영)
남양성모성지에서 초를 봉헌하고 기도를 올렸다. (사진=김우영)

남양성모성지는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1704번지에 있다.

여기에서 순교자한 이들은 김 필립보(1818~1868), 박 마리아(1818~1868), 정 필립보(?~1867), 김홍서 토마(1830~1868) 등이 있다.(‘치명일기(致命日記)’와 ‘증언록’기록) 그러나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순교자들의 숫자는 알 수 없다.

김 필립보와 아내 박 마리아 부부는 50세 동갑으로 1868년 남양 감영 포졸에게 붙잡혀 온갖 형벌에도 배교치 않았으며 교수형을 받아들였다.

정 필립보는 가혹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1867년 1월에 교수형으로 순교했으며, 김홍서 토마도 1868년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남양성모성지는 무명 순교자들의 치명터였기에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오다가, 1983년부터 성역화되기 시작했으며 1991년 10월 7일 한국 천주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되었다.

이곳에는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보타가 설계한 ‘남양 성모마리아 대성당’이 순교자들을 찬양하는 듯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다.

대성당은 연면적 4958㎡(2층, 상징조형기둥 18m 2개) 규모로써 1층은 지역주민들이 문화ㆍ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소강당(370석 규모), 2층은 미사가 진행되는 성당(1400석 규모)이다.

천천히 성지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 옛 남양장터 거리를 걸었다. 외국인들이 많다. 중앙아시아 음식점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러시아 글자로 된 가게에는 몇 년 전 우즈베키스탄 여행 때 맛있게 먹었던 둥근 빵인 탄드르와 벽돌처럼 생긴 빵도 있어 반가운 마음에 하나씩 샀다. 두 개 합쳐 5000원.

우즈베키스탄 빵. (사진=김우영)
우즈베키스탄 빵. (사진=김우영)

저녁 때 수원으로 돌아오니 전화가 온다. 타종 때 만나 한잔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단 한 번도 맨 정신으로 새해를 맞은 적이 없었는데 올해도 다르지 않다.

술을 줄여야 하는데...이젠 나이도 노년을 향해 가는데...

벗들, 2024년 새해에는 조금씩만 마시자.

아차, 아까 남양성모성지에서 기원할 때 ‘절주’도 포함시킬 걸.

제야의 종 타종식에 모인 인파. (사진=김우영)
제야의 종 타종식에 모인 인파. (사진=김우영)

※ 2024년이 밝았습니다. 수원일보 독자여러분, 새해 건강과 평화, 기쁨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