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화성연구회 성신사 고유제를 마친 회원들.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2024년 화성연구회 성신사 고유제를 마친 회원들.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지난 13일 (사)화성연구회(이사장 최호운)는 성신사 고유제를 개최했다. 화성연구회의 고유제는 2001년부터 시작됐다.

정조대왕은 “화성의 준공을 앞두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좋은 날을 가려 성신묘(城神廟)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때에 맞춰 제사를 지냄으로써 “나에게 수(壽)를 주고 복(福)을 주며 화성이 만세토록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며 제문(祭文)을 직접 짓고 향을 내렸다. 제수용품도 직접 지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성신사는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사라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성연구회는 2001년부터 이 곳에서 성신사 중건·복원을 위한 고유제를 올렸다. 한편으로 각종 문헌 자료 연구와 현장 지표조사를 통해 이 자리가 성신사 위치였음을 확인하고 중건 캠페인을 펼쳤다. 이에 수원시는 성신사를 중건·복원하기로 결정했고 기업은행이 건립기금을 쾌척했다.

2007년 11월 5일엔 성신사 복원을 위한 강감찬 동상 이전 공사를 했다. 성신사 준공식은 2009년 10월 8일에 열렸다. 그 후에도 화성연구회의 고유제는 계속되고 있다.

더욱 고마운 일은 올해 수원시가 고유제 예산을 세워준 것이다. 우리가 요청을 하지 않았는데도 종무담당 공직자가 성신사 고유제의 역사·문화적 중요성을 인지하고, 스스로 예산을 만들어주었으니 크게 복덕 지을 일을 했다. 따라서 화성연구회는 오는 3월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에 충실한, 제대로 된 고유제를 올리기로 했다.

고유제가 끝난 후 2024신년회가 열렸다. 새해 덕담을 나누는 자리로 ‘역대급’으로 많은 회원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초대 이사장을 지낸 김이환 이영미술관장의 건배사가 있었다.

그런데 건배사는 추모사가 됐다.

“화성연구회 고문이셨고 2001년 첫 번째 성신사 고유문을 쓰셨던 강대욱 전 경기도박물관장님의 별세소식을 들었습니다. 확인해 보니 안타깝게도 벌써 장례가 끝난 뒤였습니다”

우리도 부음을 전해 듣지 못한 상태였다. 회원들은 모두 일어서서 숙연하게 추모 묵념을 했다.

2001년 화성연구회 해미읍성 역사유산 답사 때 함께 한 강대욱 전 경기도박물관장.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2001년 화성연구회 해미읍성 역사유산 답사 때 함께 한 강대욱 전 경기도박물관장.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수필가이기도 했던 강대욱 선생과는 지역 문인모임에서 만났다. 역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나이차이는 많이 났지만 나를 친구처럼 대했다. 둘 다 막걸리를 좋아해서 선생이 살던 연무동 버스 종점 구멍가게나 도청 아래 대폿집에서 자주 만났다.

내가 신문사로 직장을 옮기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당시 선생은 경기도청 경기도향토사료관에 근무하면서 경기도박물관을 탄생시키기 위한 기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선생은 1968년 양주군 공무원 공채 1기로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84년 ‘자기 고장의 역사·문화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역사관 건립’을 목표로 유물과 경기도 연혁 자료정리 등 역사관 자료를 수집, 1985년 ‘경기도향토사료집’을 발행했다. 1986년에는 경기도 박물관의 모태인 경기도향토사료관을 개관했다.

이때 나는 선생의 입지전적인 삶과 열정적인 역사저술활동을 소개하는 기사를 중부일보에 썼다. 원고지 20매가 넘는 통판(전면) 기사였다.

이 기사덕분이라고 선생은 말했다. 고등학교 학력의 자신이 초대 경기도박물관장이 된 것이.

아무튼 그 이후 선생과의 친분은 더욱 두터워졌다.

경기도박물관장에서 사임한 후에도 경기도역사연구회장을 맡아 지역사 연구에 일조를 했다.

선생이 펴낸 책은 역사풍류기행 ‘이화우 흩날릴 제’, 역사 기행집 ‘발길에 세월을 묻고’ 등이 있다. ‘이화우 흩날릴 제’는 1990년 문화부가 선정한 문학 부문 우량도서가 되기도 했다.

또 500여년 한반도의 중심에서 경기도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을 관장했던 경기관찰사 279명 일대기를 문집, 연구논문 등 관련 자료를 참고해 정리한 역사서 ‘기백열전(畿伯列傳)’은 매우 중요한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경기금석대관’을 비롯한 각종 향토사 연구서를 기획, 간행해 경기도 역사를 집대성한 인물이란 평을 받았다.

“정조의 시어(詩語)가 수원의 어제와 오늘을 일깨우는 시비(詩碑)의 건립을 제안한다. 장안공원 어디쯤, 세계인의 관광객 발길이 머무는 곳에 영어와 일어, 중국어의 번역을 함께 한 배경설명안내문과 시비를 세워 우리의 생활상을 대변하는 대화와 시정이 어우러진 현장이 되었으면 한다...(중략)...삼남대로의 요충, 수원의 지리와 민생의 행복이 최우선 과제였던 실학군주의 현장감, 국방의 주역 삼군(三軍)의 용솟음치는 애국열정을 시어로 표현한 정조의 시정(詩情)이 오늘의 수원을 일깨우는 생활현장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언젠가 나와 막걸리를 마시면서 선생이 했던 말이다. 생각이 같았던 나는 그 내용을 칼럼으로 써 줄 것을 부탁했고 이 글은 내가 주간으로 있던 매체에 실렸다. 원고료를 받아든 선생은 또 막걸리 집으로 나를 불렀다.

몇 년 후 선생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고 요양 차 수원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리곤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뒤늦은 별세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존경하던 많은 이들이 몇 년 새 세상을 떠났다. 강대욱 선생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 늦었지만 죄스러운 마음을 담아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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