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평론가 박장호는 1월 16일 자신의 페북에 튀르키예 구국 영웅 '무스타파 케말'과 대한민국의 구국 영웅 이순신을 비교하면서 인간 면모를 강력하게 평가하는 글을 올렸다.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 본국이 무너지고, 우리가 이젠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살아남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오늘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으리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가 갈리 폴리 전투에서 병사들에게 남긴 명언이라 한다.

이 전투 이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게 '퍄샤'라는 칭호가 붙었다. 지도자(파샤)란 뜻이다. 

이순신 장군 초상.
이순신 장군 초상.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영화 '명량' 포스터.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영화 '명량' 포스터.

문득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이후 남은 12척 배로 일본 300척 대함대를 격파한 ‘명량해전’을 치루기 전날 썼다는 휘호가 생각 난다.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 /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영웅은 결단이 중요하다. 어떤 결단은 죽음을 불사해야 하고 이런 영웅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한줌의 흙, 피 한방울마저 결국 조국(motherland)이 된다.

이 한줌의 흙에 새생명과 새주인, 새미래가 찾아온다. 

케말 파샤와 이순신은 많이 닮았다. 형제의 나라라는 튀르키예와 한국도 분명 많이 닮았다.

두 영웅은 위기에 강했으며 그가 사랑한 백성과 후세도 두 영웅의 인간적 면모를 더 높이 새기고 있다.

튀르키예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아타튀르크 케말'.
튀르키예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아타튀르크 케말'.
앙카라 골동품상에서 구입한 옛날 돈에도 '아타튀르크 얼굴사진이 있다.
앙카라 골동품상에서 구입한 옛날 돈에도 '아타튀르크 얼굴사진이 있다.

무스타파 아타튀르크 케말은 1912년 오스제국의 군 지휘관이었고 1920년 튀르키예 대국민회의 지휘관을 거치면서 1923년에는 튀르키예 대통령이 된다. (1923-1938)

튀르키예 모든 관공서 건물 내부, 외부 , 거리, 회사 사무실, 식당에 조차도 그의 초상화를 흔히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이스와 앙숙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이스 데살로니키에서 태어났다. 데살로니키는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지척에 있다.

앙카라에는 아타튀르크 케말을 기리는 아니트 카비르( ANITKABIR)라는 영묘가 있다. 아니트 카비르를 찿는 튀르키예 국민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꽃을 든 방문- 매일 매일 그 손길이 끊이질 않는다.

아니트 카비르 영묘 부조.
아니트 카비르 영묘 부조.

필자 역시 지난 '하제테페 막사발실크로드 심포지엄2023' 행사 때에도 각 국의 참여작가들과 함께 아니트 카비르 영묘를 찿았다.

아니트 카비르 입구에는 큰 석상이 있는 군인과 함께, 한 여인의 손에는 막사발 그릇을 손에 얹고 있다.

세계막사발 실크로드라는 대장정을 대한민국을 필두로 몽고, 중국,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우주베키스탄, 튀르키예를 거쳐 유럽으로 향하는 거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초원의 길 ,실크로드의 길- 이 모든 길로 통하는 작금 21세기의 길을 떠나야 하는 우리로선 그 길이 분명 찿아야 할 대한민국-우리나라의 길임에 틀림없다.

뭘 주저하는가! 천동설, 지동설을 논하는 시대가 아니다. 우리가 거쳐야 하는 은하단의 지구도 또다른 우주를 향해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과학은 밝혀 내고 있다.

빠르게 흐르는 우주의 은하단처럼  새롭게 쓰는 역사를 우리는 만들어야 한다. 

첨단 우주의  21세기를 밝히는 막사발 실크로드길을 만듭시다. 아트 포 피스!!!

아니트 카비르 영묘앞_ 하제테페막사발심포지엄 2023 참가 작가들과 함께.
아니트 카비르 영묘앞_ 하제테페막사발심포지엄 2023 참가 작가들과 함께.

 

#튀르키예의 독립전쟁과 문자개혁을 나무위키에서 발췌해 인용한다.

튀르키예 독립전쟁

1차 대전이 끝나고, 협상국은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려고 시도했다. 협상국은 세브르 조약을 맺어서 수도 코스탄티니예와 그 주변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외치는 그리스가 아나톨리아로 진군해왔기 때문에 튀르키예는 멸망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당시 야사로 영국 육군 장교들과의 에피소드가 있다. 코스탄티니예를 점령한 영국 육군 장교들이 한 호텔에서 술을 마시는데, 케말을 보고 자신들의 테이블로 와서 한 잔 하자고 권유했다. 그러자 케말은 "이곳은 우리 땅이오. 그러니 당신들이 내 테이블로 와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1919년 5월 19일 무스타파 케말 에펜디 중장은 술탄의 명령으로 흑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 삼순(Samsun)항으로 오게 된다. 케말이 맡은 임무는 술탄에게 거역하며 소규모적인 저항을 벌이던 군대 진압 및 민족주의 단체 해산이었다. 그러나 삼순에 도착한 케말은 되려 휘하 병력을 이끌고 토벌하려던 군대와 합류했으며 이스메트 파샤 대령[6]도 그를 만나게 되면서 합류한다.[7] 이에 경악한 술탄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Altıncı Mehmet Vahidettin)은 궐석재판을 열어서 케말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울어진 제국군 상부의 힘은 그를 잡을 힘도 없었고 여론과 많은 군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퉈 그에게 합류하기에 바빴다.

7월 8일 그는 이제 자신이 오스만 제국의 군인이 아닌 튀르키예 민주공화국의 군인임을 선언했고 에르주룸(Erzurum)에서 공화국 대표자 회의를 가졌으며 8월에는 시와스(Sivas)에서 항전결의를 한다.

1920년 4월 23일(이날은 튀르키예 공화국 건국기념일이다.) 케말 장군은 군사 요충지인 앙카라[8]에서 국민회의를 주최하고, 자신의 명성과 국민 정부의 명분을 바탕으로 군의 지지를 확보했다. 케말 장군은 우선 산발적인 전투로 소아시아 해안의 그리스군을 괴롭혔고, 이에 시달린 그리스군은 케말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소아시아 내륙으로 진공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군의 역량 한도를 벗어나는 무리한 작전이었다.

당시 그리스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는 승리만을 추구하고자 무리한 작전을 고집했고 13만에 달하는 그리스군이 파병됐으나 무리하게 전선을 넓히면서 제대로 보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튀르키예인들은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그리스군을 괴롭혔고 그의 뜻에 맞춰 많은 군대와 민병대가 손을 잡고 아르메니아 및 프랑스 같은 다른 점령군들과 전투를 벌였다. 한편 튀르키예 동남부의 도시인 아이은탑(Ayıntab)에선 프랑스 육군이 1년이나 압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샤힌 베이(Şahin Bey, 1877–1920)가 이끄는 300여 민병대가 11개월에 걸친 항쟁 끝에 자신들보다 12배가 많은 프랑스 육군을 물리치면서 많은 피해를 입고 보급책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프랑스 육군이 물러서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 육군은 다시 장비와 병력을 새로 보강하여 여길 재공격했고 결국 압도적으로 밀린 상황(병력 수도 그렇고 무기와 총알도 부족했다)에서 샤힌 베이와 부하들은 모두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원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가 군인이 아닌(젊은 시절 징병되어 사병으로 복무하긴 했다) 민간인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 케말은 아이은탑(이 동네 사투리로는 안텝이라고 불렸다)을 찬양하면서 수호자라는 뜻을 가진 가지(Gazi)를 붙여서 지금의 가지안테프시가 된다.

아르메니아군도 유수프 베야즈오을루(Yusuf Beyazoğlu, 1880–1956)가 이끄는 민병. 군부대에게 숫적 우세임에도 크게 밀려서 되려 아르메니아군이 민병대의 공격을 받고 후퇴해야 했고 차례로 점령지를 다시 빼앗기고 물러나야 했다. 옛 아르메니아 수도 아니를 탈환하려던 아르메니아군은 베야즈오을루가 이끄는 부대에게 역습당해 2천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군이 죽었는데 당시 아르메니아군 군이 1만 6천 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 피해는 엄청났다. 결국 아르메니아와 프랑스는 연전연패 속에 물러나야 했고 서쪽 카르스 지방을 지배하던 러시아군도 무사 캬즘 카라베키르(Musa Kâzım Karabekir, 1882–1948)가 이끄는 민병대와 군인들에게 고전하면서 오스만에서 물러서고 있었다. 결국 홀로 남아서 끈질기게 싸우던 게 바로 그리스군이었다. 이렇게 다른 부대가 맹활약한 가운데 케말은 그리스군과 총력을 다한 전투를 벌인다.

1921년 8월 23일부터 9월 13일까지 무려 3주일 동안 밤낮없이 양군이 계속 전투를 벌인 사카리아 전투(Sakarya savaşı)에서 총사령관으로 참전한 케말은 그리스군을 물리쳤으며 이 패배로 많은 전사자[9]를 내고 사기도 떨어진 그리스는 차례로 점령지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런 연전연패 속에 협상국은 케말에게 전령을 보내 세브르 조약을 재수정하여 코스탄티니예와 타우르스 산맥 사이의 아시아 튀르키예를 보장할 테니 군대를 물러나게 하라고 했으나 당연히 케말은 씹었다. 그는 전령에게 세브르 조약의 전면 무효가 아니라면 제의 같은 건 집어치우라고 일갈한다.

1922년 8월 30일 퀴타햐(Kütahya) 근처의 둠루프나르(Dumlupınar)에서 그리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다. 니콜라오스 트리쿠피스(Νικόλαος Τρικούπης, 1869–1956) 중장이 이끄는 그리스군 19만 6천 명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18만 군 및 민병대가 맞붙은 이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2300여 명이 전사한 반면에 그리스군은 1만 명이 넘는 전사자와 2천 명이 넘는 실종자를 내고 압도적으로 패한다. 이날은 튀르키예에서 '승리의 날(Zafer bayramı)'이라 불리며 한국의 광복절과 비슷한 위상을 갖는 국경일[10]이다. 이후 국민회의군은 퇴각하는 그리스군을 추격한 끝에 그리스군의 본거지인 이즈미르 근처까지 진격한다. 9월 이즈미르에서 거주하던 튀르크인들이 대거 저항하면서 그리스계와 튀르크계의 충돌이 벌어졌고 그리스군의 학살로 많은 튀르크인들이 학살당하자 케말은 이스메트 파샤와 함께 이를 세계에 알린다. 이 학살로 그리스의 아나톨리아 점령은 정당성을 잃게 되었고 역습으로 오스만 전역에서 그리스계들이 보복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22년 11월 21일 스위스 로잔에서 새로운 회의가 열렸고 이젠 케말 장군과 국민회의 측은 정당한 정부로서 이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얻게되었다. 더불어 케말 장군은 술탄을 추방했으며 오스만 제국을 무혈로 멸망시켰다.

로잔 회의가 열리면서 전투는 일시 휴전되었다. 세브르 조약 완전 무효를 요구하는 케말과 국민회의 측 주장에 그리스는 반발했으나 프랑스와 아르메니아는 받아들이면서 물러서려고 했고 영국과 러시아을 비롯한 다른 협상국도 전쟁을 지겨워하면서 오스만 내에서 물러날 기회만 보고 있었다. 그리스는 트라브존을 비롯한 일부 지역으로 점령지를 줄인다고 물러났으나 케말은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1923년 2월 다시 전투를 재개한다. 이미 그리스군은 사기를 잃고 점령지를 겨우 지키거나 아니면 물러서는 소극적 자세로 나섰고 반대로 사기가 충천한 국민회의군은 계속 그리스군의 점령지를 하나둘 탈환했다. 결국 아나톨리아의 그리스군 거점이던 이즈미르를 탈환하고 그리스가 세브르 조약으로 얻은 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면서 1923년 7월 24일 마침내 세브르 조약을 파기하고 로잔 조약을 새롭게 맺으며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의 승리로 튀르키예의 본토인 아나톨리아는 대부분 사수해 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다.

1923년 3월 24일에 발간된 타임지에 화제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튀르키예어 문자 개혁

튀르키예어에 라틴 문자가 도입된 것은 아랍 문자라서 문제이고, 라틴 문자가 좋다는 문제가 아닌, 튀르키예어를 표기하는 합리적인 문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후의 이란이나 이라크, 리비아, 레바논, 시리아 등에서 아랍문자를 썼음에도 문맹을 퇴치한 사례나 글자수가 많은 한자를 쓰고 있음에도 문맹률이 10% 이하인 중국, 대만, 일본, 홍콩의 사례를 볼때 튀르키예어도 아랍문자를 계속써도 문맹퇴치는 되었을것이나, 이 당시에 초등교육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을 정도로 학교시설의 부족이 매우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익히는데 시간이 걸리는 아랍문자 대신에 단기간에 빠르게 배울 수 있는 라틴 문자를 채택한 것이다.

튀르키예어는 고대에는 초기 돌궐 문자로, 중세에는 위구르 문자로 기록되었는데, 13세기부터는 몽골어 어휘와 페르시아어 어휘가 튀르키예어에 유입되었다. 여기에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공용어인 오스만어에 아랍어, 페르시아어 요소를 많이 받아들였고 표기 문자 역시 아랍 문자로 갈아탔다. 하지만 아랍 문자는 자음 문자에 비해 모음 표기 문자가 적었기 때문에 튀르키예어 표기에는 적절치 않았고 그 결과 불필요한 자음 표기는 너무 많고, 튀르키예어에 필수적인 모음 표기는 터무니 없이 부족한[16] 상황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1927년 조사에 의하면 당시 튀르키예인 중에서 아랍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7%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케말 파샤는 아랍 문자 29자, 페르시아 문자 4자를 폐기하고 라틴 문자를 도입하는 언어개혁을 벌인 것이다. 여기에 만들고 땡이 아니라, 입말에서도 기존 오스만어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에서 차용한 일상적인 단어를 기존 튀르크 계통의 고어와 방언에서 대체하여서 서구식 어휘를 차용해서 새로운 튀르키예어의 기본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랍, 페르시아 계통의 외래어를 없애고 튀르키예 고어를 샅샅이 조사해서 복원했다. 한국으로 따지면 한자, 영어 외래어를 없애고 고전에 나오는 향찰, 이두 등의 순우리말을 복원해서 새 단어를 만들어낸 셈. 그리고 이 문자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초등학교를 만들었고, 성인에게도 4개월간 강습을 받게 하였으며, 학교가 없는 마을에는 순회학교까지 개설했다. 그리고 케말 자신이 순회학교에 나가서 순회학교 일일교사가 되어 문자 교육까지 하는 노력도 보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1935년의 조사에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200만 명이 넘게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케말은 알파벳 행진곡이란 노래까지 직접 작사, 작곡을 하고, 초등학교 교과과정에 그대로 넣으려고 했지만, 불과 하루 만에 "내가 만들었지만 진짜 별로다(...)"라는 평가를 내려 그대로 폐기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데 이 문자개혁 직전에 튀르키예어 학자, 다른 국가 어학자들[17]이나 정부에서는 정착까지 약 2~3년 걸릴 것이라고 봤고 그때까지는 혼란방지와 튀르키예 국민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튀르키예 새 문자-아랍 문자 병행표기를 해야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케말은 "몇 개월 정도 해보고 아니면 말든지"란 태도로 혼용없이 바로 새 문자체제로 들어갔는데 의외로 혼란은 그렇게 크지 않고 아주 빠른 속도로 튀르키예 사회에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국민들이 "존경하는 가지[18]께서 우리를 위해 문자를 만들고 개혁한다는데 당연히 따라야지"란 생각으로 이 문자를 배우려는 열의가 너무 커서 가능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문맹률이 높아서 역설적이게도 새로 배워야 할 사람이 적었다. 그 과정에서 아타튀르크를 비롯한 튀르키예 교육부, 공무원들의 엄청난 노력은 말할 것도 없다.

왜 하필 라틴 문자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는데, 탄지마트 이후 오스만 제국의 상류사회에서는 프랑스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하던 전통이 있었고, 이스탄불 같은 경우 어딜 가든 상점이든 호텔이든, 관공서든 오늘날 한글 밑에 영어표기를 병기하듯 프랑스어를 병기했다. 당시 상류층들은 튀르키예어를 라틴 문자로 옮겨서 일종의 암호처럼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기도 했다. 때문에 라틴 문자는 선진적인 유럽 문명의 상징이기도 했고, 이미 라틴 문자 사용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라틴 문자를 개량해서 튀르키예어를 표기하는 것이 더 경제적으로 여겨졌다.

당시에도 투라니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당시 해독되어 한창 연구 중이던 돌궐의 문자를 현대 튀르키예어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돌궐 문자를 현대 생활에 맞게 사용하려면 타자기 자판도 새로 만들어야 하고, 이래저래 비용과 노력이 기존에 이미 널리 쓰이는 문자를 개량해서 사용하는 것에 비해서는 더 많이 들었기 때문에 기각되었다. 아랍 문자와 페르시아 문자 이외에 당시 튀르키예인들에게 잘 알려진 문자라고 해봐야 그리스 문자, 키릴 문자, 라틴 문자 정도였는데 수백 년간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인해 튀르키예인들 사이에 반러 감정이 높았기 때문에 국민 감정상 러시아가 쓰고 있는 키릴 문자를 보급할 수는 없었고, 그리스야 뭐 더 말할 것도 없는데, 튀르키예 독립전쟁 이후로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스인들이 쓰는 그리스 문자는 거들떠보지조차 않았다.[19] 그러니 남은 선택지는 라틴 문자밖에 없었고 라틴 문자는 전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문자이기도 했으니 튀르키예를 근대적 국제질서에 편입시키고자 했던 케말은 당연히 새로 도입할 문자로 라틴 문자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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