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년 전인 1975년 수원에서 ‘시림(詩林)동인회’란 문학모임이 탄생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다. 내가 주도한 이 동인회의 초기멤버는 수원의 문학청년들이었는데 이듬해부터 전국 규모로 확대됐다.

1970년대 ‘학원’이란 잡지 문예란인 ‘학원문단’과 ‘샘터’ ‘새농민’ 등 잡지 문예란에서 눈에 띄던 시를 발표하던 이들로 구성됐다.

당시 시 좀 쓴다는 전국의 문청들 사이에 이름을 대면 알만한 사람들이었다. 수원의 김우영과 대구의 이정환·박기섭, 부산의 최영철·조성래, 광주의 김미구, 제주의 오승철(작고), 서울의 문창갑, 안동의 김승종, 대전의 최봉섭, 순천의 김기홍(작고)과 김해화 등이 참여했다. 이밖에도 몇몇 사람들이 동인으로 활동했지만 끝까지 함께 하지는 못했다.

동인 가운데 오승철 시인과 이정환·박기섭 시인은 한국 시조문학계를 대표하는 중진시인으로 입지를 굳혔다. 오승철·박기섭 시인은 오늘의 시조시인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이정환 시인은 현재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으로 선출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 중 오승철 시인은 지난 해 세상을 떠나 우리들을 안타깝게 했다.

최영철·조성래·김미구·문창갑·김승종·최봉섭·김기홍·김해화 시인은 뛰어난 작품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았는데 김기홍 시인은 지금 이 세상에 없고 최봉섭 시인은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됐다.

시림동인들은 군에 입대하거나, 취업 등으로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9년 다섯 번째 동인지인 ‘70년대 학생문단의 주역들, 詩林 그 후 10년 그들의 현주소!’라는 부제의 ‘그대 걸어갈 광야는 멀다’를 다시 펴냈다. 당시 열음사라는 출판사에 근무하던 최영철 시인의 힘이 컸다.

그러다가 2019년 수원에서 다시 뭉쳤다. 제주에서 오승철 시인이 비행기를 타고 왔고, 부산에서 최영철 시인이 천리길을 마다않고 왔다. 서울에서 문창갑 시인이, 분당에서 김승종 시인이, 평택에서 김미구 시인이 와서 반갑게 만났다.

이날 제주도에서 모임을 갖고 동인지 6집도 다시 내자고 했으나 태풍이 닥쳐 모임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승철 시인의 암 투병 소식이 들려왔다. 오승철이 세상을 떠난 뒤 수도권에 살고 있는 나와 문창갑, 김승종, 김미구 시인 등이 종종 만나고 있다.

지난해 가을 평택에서 가진 술자리에서 세상 떠난 오승철·김기홍 시인과의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김기홍의 동향 친구인 김해화 시인을 떠올렸다. 며칠 전 김해화시인과 통화를 한 적이 있다고 하자 동석했던 김미구 시인은 스무살 무렵 김해화 시인의 고향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면서 전화를 걸었고 우리가 김해화 시인이 사는 구례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러나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았다.

49년만에 첫 만남을 가진 김해화(오른 쪽)와 김우영. (사진=김우영)
49년만에 첫 만남을 가진 김해화(오른 쪽)와 김우영. (사진=김우영)

지난 주말 문득 그가 생각났다. 그리고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다가 생전에 못 만날 수 있겠다 싶어 구례로 내려가겠다고 전화로 ‘통보’했다.

다음날 새벽 기차를 탔다. 구례구역엔 그가  나와 있었다. 반갑게 손을 잡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100년 쯤 사귄 벗 같았다. 

구례 5일장터에 있는 그의 단골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소주, 나는 막걸리를 앞에 놓고 다시 악수를 했다. 손이 거칠었고 손가락 관절도 굽어 있다. 그렇지. 이 사람이 철근공이지. 나와 다를 수밖에. 내 손이 부끄러워 막걸리 잔을 얼른 들어올렸다.

역시 전라도 음식점이었다. 돼지불백 쌈밥을 시켰는데 반찬이 끝도 없이 나온다. “간 좀 봐 주세요”라면서 새로 무친 굴무생채 한 접시가 또 상위에 올려 진다.

그 집을 나와 그가 자주 가는 거꾸로 흐르는 섬진강 옆 국수집과 쌍계사 앞 식당에서 다시 한잔씩 더했다. 하루 종일 술타령을 한 것이다. 겨울비 탓이라며 웃었다.

​순천 웃장 파장 무렵 봄비 내렸습니다./우산 들고 싼거리 하러 간 아내 따라 갔는데/난장 바닥 한 바퀴 휘돌아/생선 오천 원 조갯살 오천 원/도사리 배추 천 원/장짐 내게 들리고 뒤따라오던 아내/앞서가다 돌아보니 따라오지 않습니다//시장 벗어나 버스 정류장 지나쳐/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비닐 조각 뒤집어 쓴 할머니/몇 걸음 지나쳐서 돌아보고 서 있던 아내/손짓해 나를 부릅니다/냉이 감자 한 바구니씩/이천 원에 떨이미 해가시오 아줌씨/할머니 전부 담아 주세요/빗방울 맺힌 냉이가 너무 싱그러운데/봄비 값까지 이천 원이면 너무 싸네요/마다하는 할머니 손에 삼천 원 꼭꼭 쥐어주는 아내//횡단보도 건너와 돌아보았더니/꾸부정한 허리로 할머니/아직도 아내를 바라보고 서있습니다/꽃 피겠습니다. -<아내의 봄비> 김해화

이런 심성을 가진 그와 헤어져 구례구역에서 상행선 기차를 탔다. 그는 순천 친구들 모임에 가야한다고 했다.

꿈같은 하루였다. 원래는 구례에서 1박할 생각이었으나 취기가 너무 올랐고 그도 선약이 있어 후일 수원 만남을 기약했다.

안타깝게도 요즘 몸이 아프단다. 등을 다쳐 진통제를 먹어야 한단다. 건설 노동자들은 몸이 재산인데... 어서 낫기를 빈다. 그대가 다음날 보내온 문자처럼 ‘함께 건강’해져 수원에서 다시 만나게 되길.

비 내리는 구례 섬진강. (사진=김우영)
비 내리는 구례 섬진강. (사진=김우영)

 

<김해화 시인은?>

-1957년 전라남도 승주 출생.

-주암초등학교 졸업.

-1976년 시림동인

-1984년 실천문학의 시집 ‘시여, 무기여’로 작품 활동 시작.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공장생활, 공사판 철근공 등의 일을 함.

-시집 ‘인부수첩’, ‘우리들의 사랑가’, ‘누워서 부르는 사랑 노래’와 시와 사진을 모아 엮은 ‘김해화의 꽃편지’를 냈다.

-민족작가연합 상임대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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