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사랑에 어찌 부와 모에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사정과 상황에 따라 현상에 차이가 있을 뿐. 20세기 중엽 이래 여권의 향상과 아울러 모성애가 더 부각되고 있다. 한 유명인이 육이오 피란 도중에 포탄이 떨어지자 아버지는 혼자 황급히 도피하였으나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자신의 몸으로 감쌌다고 하여, 모종 여운이 짧지 않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가족의 그 사실이 부모의 자식 사랑 전체의 질량을 우열로 재량할 수 있다하기 어렵고, 더욱이 이 세상에 일반화하기는 더 어렵다. 가부장의 권위가 거의 해체된 오늘, 그간의 경과에서 추락하다시피 하던 아버지의 위상을 풍자하는 개그들이 이어졌었는데, 그 끝 편이 아마 가정의 서열에서 아버지의 순위가 반려동물 아래라는, 농담이기도 하고 진담 비슷한 한 개그가 아니었나 한다. 중장년 남성들이 더 즐겨 언급한 것 같다. 어떤 심사에서였는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지만, 이전 아버지 세대 가부장 권위의 일부 허상을 인정하는 가운데 유머 성격의 자조였던 것 같다. 군자와 어른이 사라지고 봉급생활자가 대량 양산된, 기능 위주 산업화 시대의 조류가 그 환경이기도 한 것으로 이해한다.  

 각설하고 다음 시는 그래서 아버지이건 자식이건, 자식이면서 아버지이건, 아니 여성이라면 더욱 읽어봐야 할 요즘 보기 드문 사부곡(思父曲)이다. 

 

남국에 사는 어떤 새는

처음 태어나 배운 아버지의 노래를

일생을 외어 부르며 산다고 한다

그 노래로 외로움을 달래고

그 노래로 피붙이를 구별하고

그 노래로 사랑을 찾아서

자식이 태어나면 다시

그 노래를 가르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태어나 너무 일찍 아버지를 잃는 바람에

아버지의 노래를 배우지 못하고

내가 만든 노래로 외로움을 달래고

내가 만든 노래로 사랑을 찾으며

내가 만든 노래를 부르며 이제껏 살아 왔다

 

아버지도 그 일이 차마 안타까운지

가끔씩 내 꿈속에 찾아와

아버지의 노래를 가르치려 하지만

꿈은 짧고 너무 희미해

아버지의 노래를 배우지 못한다

 

아버지의 노래는 어떤 노래일까

내가 만든 노래의 빛깔     

내가 만든 노래의 의미가

그 옛날 아버지가 부르던 노래일까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꿈꾼 날

아버지의 노래를 생각하며 길을 걷는다

                         - 「아버지의 노래」/박수진

 

 무엇보다도 화자에게 부재하는 아버지는 성장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비상한 결핍의 대상이기에 앞서 다하지 않는 사모(思慕)의 대상이다. 거친 세상살이에 필요한 교훈이나 기대를 포함하여 아버지가 지녔던 신념이나 견해를 사랑과 체온으로 전수받지 못했다는 유감이 의식의 저변에 깔려있지만, 어린 자식을 두고 일찍 떠나가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고, ‘아버지도 그 일이 차마 안타까운지/가끔씩 내 꿈속에 찾아와/아버지의 노래를 가르치려’한다며 아버지보다 더 안타까워한다. 원망의 승화가 아니라 애초부터 화자는 사리와 도리에 따르는 인격의 심정에 젖어있다. 그냥 아버지를 불만스러워할 수 있고, 자신의 어떤 여건이나 미흡한 한계가 아버지의 부재에서부터 기인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런 아버지들은 변명하지 않을 것이지만. 하지만 화자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나타난 ‘꿈은 짧고 너무 희미해/아버지의 노래를 배우지 못한다’고 오늘도 탄식해마지 않는다. 

 우리 독자들은 화자의 심정에 몰입되어 이 대목을 깊은 동정과 감개로 읽다가 화자에게 급박하게 위로 발언을 건넬 수 있다. 그대가 유아 때 아버지가 자신에게 불렀으리라고 추정하며 평생 그리워하는 ‘그 옛날 아버지가 부르던 노래’는, 그대가 성장하면서 ‘내가 만든 노래’라고 한 그 ‘노래’라고. 그대가 ‘이제껏 살아’오며 ‘외로움을 달래고’ ‘사랑을 찾’은 바로 그 노래라고. 그런데 이 사실을 화자는 전혀 몰랐을까. 아니, 의문이 잘못 되었다. 4연과 5연에서 알 수 있듯, 화자가 그렇게 여겨보기도 하였지만 아버지를 기리며 용납하지 않았다고 추정하여야 한다. 아버지의 부재와, 그 그리움을 고이 간직하려고. 

 이런 사부곡이라면, 화자의 혹은 시인의 사모곡은 또한 어떠할지 우리는 이 시로 잘 비견할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 부재가 아버지 재세 이상의 유친(有親)을 초래한 이 진솔한 역설, 널리 알려져 있듯, 공자 맹자와 퇴계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위대한 역설은 어째서 성립되는 것일까. 우리는 이 시를 다시 읽으며 한 조리 있는 추정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화자가 아버지를 의식하며 ‘만든 노래’는 그 무엇이든 아버지가 피안에서 기뻐하고 격려할 노래이고, 아버지를 알던 사람들이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칭찬할 것이다. 화자는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든 결코 불초(不肖)일 수 없다. 

 절절한 이 사부곡이 이 시대 모든 자식들에게 아버지란 존재와 자신과의 관계를 자신의 삶 추구에 결부시켜 생각하는 계기를 선사하였으면 한다. 나아가 이미 자식들에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었을 현재 모든 아버지에게 자식에게 들려줄 노래가 또 무엇이 더 있고 더 나은 것이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흐르고,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자란다. 

 

 사족 : 우리 현대시에도 사모곡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부곡이 이어지면 좋지 않겠는가. 췌언이지만 아버지를 기리면서도 부정도 하고 추월하면 더 좋으리. 이 기대는 모든 아버지의 노래에 있는, 그 일부이기도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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