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절보다 사랑이 허구와 실제 도처에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물질화가 병행하고, 무슨 짤[짧은 동영상]처럼 가볍고 덧없는 사례가 많다는 탄식도 이미 오래다. AI 위주 4차 산업의 본격화와 더불어 인간관계의 이합집산도 심화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해와 취향의 알고리즘에 영향 받으며, 개인으로 집단으로, 상호 소외와 고초를 겪을 인간, 그러나 자신을 방기하듯 외면하며 끝내 그대로 좌절하기야 하겠는가. 가상세계는 가상세계대로 ‘저만치’에 두고, 이 제한된 시공에서 삶의 활생(活生)과 그 진정성을 화두로 하여 새로운 휴머니즘이 전개될 것이다. 대면과 대화, 교감과 교류의 인간관계에 기초한 사랑, 그 깊이와 넓이도 회복되리라 믿는다. 이런 화제 자체가 어쩌면 시시하고 어쩌면 과장된 난제라는 시각도 있겠는데, 오늘 읽을 시와 관련하여 우선 한번 점검해보고 싶었다.  

 

낯이 익다. 뒤돌아서 간 너는, 너의 뒤태마저 가리려는 듯

물안개는 피어나고 혹 우리가 만났던가 따지지 않아도

넌 생시의 골목이 아니더라도

내 꿈속에 드나들며 천 년 동안 만나온 사람 같아

 

백 년 솔밭에 달빛 흐르면 우리는 우리의 작은 죄 하나 부끄러워

달맞이꽃 그늘에 숨어 참회로 울던

우리 그렇게 하여 우리의 마음 청정지역이어서

십장생이 살고 천년 학이 와서 춤추며 놀다 갔을 터

 

아무리 보아도 낯이 익다. 잠깐 마주보다 멀어지는 너는

너를 싣고 떠나는

기차의 바퀴 소리 아직도 철거덕거리며 귓가에 남았는데

철거덕 소리 사이사이마다 칸나꽃 붉게 피어나고 새우는데

파도는 높고 갈매기가 만선을 노래하는데

 

낯이 익다. 넌 내가 천 년 동안 만나온 슬픈 사랑의 그 사람인 줄 모른다. 

                   - 「넌 천 년 동안 만나온 그 사람인 줄 모른다」/김왕노

 

 어느 날 일상 공간인 ‘생시의 골목’에서 화자는 문득 한 이성과 시선을 교환한다. 그런데 ‘잠깐 마주보다 멀어지는 ‘너’는 2, 3초 짧은 시간이지만, ‘뒤태’도 그렇고 ‘아무리 보아도 낯이 익다.’ ‘내 꿈속에 드나들며 천 년 동안 만나온 사람 같아’서. 그 ‘천년’은 과장도 아니고 긴 세월도 아니다. ‘꿈속’의 ‘천년’, 몰풍스러운 상기겠지만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도 하지 않나. 아무튼 ‘너’, ‘너’는 화자에게 보통 존재가 아니다. ‘기차의 바퀴 소리’와 함께 멀어지고 사라져간 연인. 이별의 ‘기차의 바퀴 소리’가 화자에게 이명처럼 늘 살아있다. 그 ‘철거덕 소리 사이사이마다’ 너에의 사랑이 자신의 귓속에서 ‘칸나꽃 붉게 피’듯 피어나고 있다고 고백한다. 또 피고 피는 칸나꽃은 그것으로도 그치지 않고, 낮밤을 ‘새우’며, 나아가 ‘파도는 높고 갈매기가 만선을 노래’한다고 한다. 자신을 ‘파도’와 ‘갈매기’로 환유하며, ‘너’에게 애착하는 사랑의 높이와 충만을 그렇게 형상화하기를 마지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양상에 좀 낯설어 하면서도 화자가 ‘뒤돌아서 간 너’를 보며 ‘낯이 익다’고 한 언급과 같이, 화자의 넋두리에 공명할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궁금하다. 두 연인은 ‘작은 죄’를 달빛에 부끄러워하고 달맞이꽃의 조력으로 참회까지 하였고, 그래서 화자는 ‘마음’이 ‘청정’해져 그 ‘백년 솔밭’에 상서로운 ‘십장생이 살고 천년 학이 와서 춤추며 놀다 갔을 터’라고 추정하였지만, 실제로 그러하였는지, 정작 ‘너’는 또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결국 이별의 정한을 하소연하는 전체 맥락으로 보아 화자의 그 토로를 우리는 그대로 승인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화자가 모종 문제를 외면하며 변명하고 있다고 하기도 어렵다. ‘물안개’는 ‘생시의 골목’에서 ‘뒤돌아서 간 너’의 ‘뒤태’만 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시의 정조는 사별의 정한(情恨)이란 것인가.

 이 문제에 연계하여 우리는 ‘너’의 두 정체를 구별해두었으면 한다. 하나는 ‘생시의 골목’에서 조우한 현재의 너. 다른 하나는 ‘작은 죄 하나 부끄러워/달맞이꽃 그늘에 숨어 참회로 울던/우리’의, 즉 과거의 그 너. 화자도 이 둘을 구별한다. 화자는 현재의 너를 ‘내 꿈속에 드나들며 천 년 동안 만나온 사람 같아’라고 하였다. 하지만 화자는 그 너를 과거의 너일 수 있다고 은연 집착하며 과거의 너를 강력하게 소환하고 착종을 조성하고, 그 너에게 ‘넌 내가 천 년 동안 만나온 슬픈 사랑의 그 사람인 줄 모른다’고 한다. 즉 과거의 너와 일치시키고 만다. 그러면서도 화자는 천재일우로 도래한 그 기회에도 ‘물안개’ 운운하며 그녀를 붙잡지 못한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시는 아무래도 사별의 순애보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꼭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는 ‘생시’를 애초에 운운한 건, ‘꿈속’과 대조하는 의도의 표현만이 아니라, 화자가 이미 별세한 너와 다른 차원의 시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중복 의장(意匠)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시는 소월의 「초혼」을 연상하게 하며, 그 전통의 지속과 변화, 그 한 재래(再來)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분방한 사랑 노래들과 더불어 천년 불망(不忘)의 이 노래도 낯설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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