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양력 1일에 새해를 맞아 생활의식을 쇄신하면서 모종 향상을 기대하였건만 어느덧 우리 대부분은 이전 타성으로 나태해졌지 않았나 한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도 있듯 작심 한번으로 변화를 성취하기 어렵다. 한편 진척 없이 해가 바뀔 때마다 향상 기대를 반복하는 심사가 부끄러워 자책할 수 있겠고, 그것도 욕심의 공리(功利)에 불과하다며 과감하게 포기해버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 유한한 일회성 삶에서 성패 여부를 떠나 미흡과 부족을 메우려는 향상과 나와 남에게 좋을 모종 바람직한 변화의 계기가 있으면 있을수록 그 자체에 감사하고, 더욱이 자연의 이치에 따른 세시(歲時)가 그 기회라면 자연의 일부인 우리에게 아무래도 더 의의 있을 것이다. 다음 시는 우리 최대의 명절인 설을 맞아 근하(謹賀)의 심정으로 애독되었는데, 인성 함양도 이면에서 촉진하여 앞으로도 설을 맞이하며 뜻깊게 읽혀져야 할 작품이다.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 「설날 아침에」/김종길

 

 날씨마저 ‘험난하고 각박’한 ‘얼음장’ 같더라도 마음을 따뜻하게 다스려 ‘새해’를 맞이한다는 화자의 독백에는 권유가 스며들어 있고, 고양된 의지와 성찰이 그 기초이다. 즉 외부의 조건과 자신의 다를 바 없는 여사한 반응에서 벗어나, 진솔한 사유로 자신과 주변을 긍정하는 마음을 회복하자고 권유한다. 그 ‘얼음장 밑에서도’ 숨쉬는 ‘고기’, ‘봄날을 꿈꾸’는 ‘파릇한 미나리 싹’같이. 이어서 지나친 자신의 욕심과 남의 부당한 횡포나 비리에 힘들고 개선의 가능성이 적더라도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자고 새해 설날 아침의 태도를 정리한다. 

 이 각성과 권유는 무엇보다도 설날 아침상을 매개로 하고 있다.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떡국)’. 화자는 ‘그것만으로도’ ‘푸지고[넉넉하고] 고맙게’ 여기라고 한다. 그런데 감사는 그것에 국한되지 않고, ‘그것’을 조화(造化)한 천지신명(天地神明)에도 감사하라는 권유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화자의 의도에 따라 이 정경과 화자의 태도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설날 아침에 우리가 마주하는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은 평일의 습관과 같은 음식이 아니다. 자연과 사회의 배려로 남과 내가 협력하여 만들고 나누게 된 비성비속(非聖非俗)의 공물(供物)에 가깝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응분의 감사를 하라고 은연 환기시키는 듯하다. 그런다면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즉 지행(志行)을 높이고 분복(分福)을 낮춘다면, 이 세상은 살 만한 세계라고 한다. 이 메시지들은 퇴계가 말년에 정립하고 지향한 성리(性理) 철학의 주요 명제,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 : 이가 발동하면 기가 따르게 되고),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 : 기가 발동하면 이로 그 추이를 통제하여야 한다)’란 주리(主理) 전통에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사물과 타인에게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는 경(敬)을 일으키는 단서를 생성하며, 관련 인문 성찰을 조촐하게 확대한다.      

 나아가 화자는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고 하는데, 먼저 이 지시화법에 우리 중 일부가 좀 불만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중 공간의 정황을 고려하면, 화자가 상정한 청자는 불특정 남이 아니다. 그의 자질(子姪)들이다. 즉 화자의 이 말투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취지에서 한 가정의 아버지나 한 가족의 어른으로서 자질(子姪)들에게 건네는 새해맞이 덕담방식이다. 그런데 함부로 꼰대 운운하는 저급한 세태에서 정작 젊은 세대야말로 설날 아침에 이런 말을 굳이 해주는 어른이 이제 그립지 않은가. 이 조언은 애정이 넘치며 타당하기도 하다. 그렇다. 인간은, ‘한 살 더’한다면 가정과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그 무엇에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그러해야하는 존재가 아닌가. ‘한 살 나이를 더한’ 그 만큼이라도.

 이 시의 압권은 끝 9, 10연일 것이다. 이상 맥락을 총괄하여 화자는 설날 아침에,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를 맞이하자고 권유를 마무리한다. 이 순백의 작고 영롱한 이미지는 그 자체 곱고 정갈할 뿐만 아니라, 막 시작하는 새해의 모습으로 부각되면서 우리의 시선을 빛나게 하며 신선한 충격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여운에는 자라난 유아들이 설날 아침에 역시 자기 앞의 생에 인내와 희망을 지니고 푸지고 고마운 그 심정으로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함께 먹는 모습도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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