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만을 섬기는 

근육을 부릴 줄 모르는

시선을 사용할 줄 모르는 

 

변명이라고는 좀체 생각해내지 못할 것 같은

한 번도 감정이 걸어 다녀 본 적 없을 것 같은

우람한 울음조차도 압사되어 바스라질 것 같은

 

여름에 두꺼운 옷 입고

겨울에 얇은 옷 입는

사뭇 계절 감각이 남다른

 

주장할 줄도

차별할 줄도

편애할 줄도 

 

모르는

모든 사물에

겸손히 갈채를 보내는

 

무람히 빛을 사는

                  - 「그늘은」/허향숙

 

 우선 우리는 말과 말뜻에 사이가 있고 미묘하지만 돌이키기 쉽지 않은 균열도 느낄 수 있어 이 시를 주목할 수 있다. 도처에서 그늘의 비상한 미덕이 열거된다. 위대하다고 할 그늘, 아니 그늘의 위대한 미덕들. 그늘은 우선 단련한 ‘근육’의 공력을 쓸 줄 모르거나, ‘시선’, 즉 눈치를 연출하며 사물을 사역할 줄도 모른다고 하였는데, 불능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읽힌다. 불능이 아니라 불위(不爲). 이 사정은 2연, 정직하고 변덕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람한 울음조차도 압사되어 바스라질 것 같은’에서 읽듯, 즉 그런 크나큰 울음도 단번에 제압하여 먼지 비슷하게 소리 없이 분산시켜버릴 정도로 그늘의 힘이 거칠고 억세다하기 때문이다. 이 힘은 단지 자신을 절제하는 탁월한 역량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정에 따라 하려고만 한다면 외부의 그 무엇이라도 얼마든지 그렇게 처치할 수 있다는 물리력 또한 그러하다는 시사를 동시에 발현한다. 하필이면 ‘압사’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또 하필이면 다른 연에서와 달리 ‘것 같은’이라며, 그늘의 다른 면모 묘사에 적용한 단정의 어조와 달리, 화자가 그럴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유사 모순어법. 더욱이, 주장하지도 차별하지도 편애하지도 않고, ‘모르는/모든 사물에/겸손히 갈채를 보내는’ 그늘. 이러한 그늘은 한편 서서히 인격으로도 변화하며, 우리가 이상으로 그리기는 하였지만 실제에서는 우리 인간들이 조성하는 속악한 현실 때문인지 소리 높이거나 낮추거나 끈질기게 간구하지 못하거나 않으면서 슬며시 포기했던 존재이다. 신도 아니고 성인(聖人)도 아니면서도 권력과 도덕, 그 둘의 장점만을 겸비한 존재. 애초부터 이미 그런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 끝없이 밀려오는 시련과 유혹을 끝내 이기려고 하거나 이긴 극기복례(克己復禮) 존재, 그러면서도 마침내 권력을 쟁취한 존재, 즉 다시 말해 도덕과 권력을 겸비하며, 특정 이데올로기와 사람들을 자신의 이해에 관련시켜 ‘주장할 줄도/차별할 줄도/편애할 줄도//모르는’ 존재[않는 존재]. 

 그래서 우리는 이 시의 끝 연, ’무람히 빛을 사는’을 짧지 않게 음미해야 할 것 같다. ‘태양만을 섬기는’ 그늘이, 귀중히 여기는 그 ‘빛’을. 아니다. 그 빛 자체가 아니라 그늘의 그, 부끄러워하며 삼가고 조심하면서 받아들이는 태도를... 그런데 새삼스럽지만 ‘태양’은 누구인가?

 4.10 총선을 앞두고 국회에 입성하려는 후보들이 이 태도를 신중히 되새겨보았으면 한다. 아니다. 우리는 그런 인물들에게만 ‘빛’을 주어 국회로 보내야 한다. 온전한 민국(民國) 민국(民國), 대한민국. 19세기 말 혁신유림부터 온갖 시련과 풍파에도 끊임없이 지향해온 지난 백삼십여 년 선대(先代) 이래 우리의 헌신과 희생은 그럴 자격이 넘친다.      

 사족 : 이왕이면 해서 위 시인의 시 한편을 이어 소개한다. “겨우내 입덧을 하는지/뼈 앙상해지고/피부는 모래 끼얹은 듯 까끌해졌다//바짝 귀 기울이면/댕그랑댕그랑/한가히 긋는 풍경 소리//머잖아 날 풀리면 야윈 몸 열어/연초록 생명들 휘황하게/쏟아 낼 그녀//오늘은/설의(雪意)를 머금은 하늘 보며/묵상에 들었다”(「겨울나무」) 그늘은 나무에 의거하고, 나무는 하늘과 대지의 결합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 ‘그녀’가 시작한 ‘묵상(默想)’은 대체 어떤 묵상일까. 알 ‘것 같은’데도, 우리는 너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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