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출산율(0.78명, 2022년)은 이미 세계 최저지만, 지난해 4분기 합계출산율이 처음으로 역대 최저인 0.6명대를 기록했다. 서울은 벌써 0.53으로 떨어졌다. 충격이고 위협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의 학령인구 추계에 의하면 지난해에 40만1752명이었던 초등학교 입학생이 올해는 34만7950명으로 줄고, 2029년에는 다시 24만4965명으로 급감해서 현재 513만1218명인 초중고 학생이 427만5022명으로 줄 것이라고 한다. “자포자기”라는 제목을 붙인 신문도 보였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육아휴직, 보육·양육 지원에 노력하고 있는데도 이렇다. 정당들은 계속해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나갈 것이다. 지자체들도 최선의 지원을 강구해나가고 있다. 기업들도 방관하지 않는다. 출산 때마다 1억원씩 지원하는 기업도 있다. 그럼에도 앞날에 대한 느낌은 암울하다.

새삼스럽게 예전의 ‘산아제한’은 쉬운 정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젠 가임 부부들이 쉽게 “그럼 우리도 아기를 낳겠다!”고 할 것 같지 않아서 안타깝기만 하다. 일할 사람(세금 낼 사람)이 줄어들고, 시장 규모가 불안정해지고, 대학들이 문을 닫게 되고, 다른 나라 학자까지 나서서 한국의 국방이 걱정스럽다고 했지만 마침내 우리는 병력도 모자라게 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현실을 인정하고 그 현실에 바탕을 두어 지속가능한 발전방안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교육의 방향 전환은 핵심과제가 될 것이다. 학령인구 감소 추세는 거스를 수 없으므로 이 상황을 고려한 유·초·중등교육 정책의 방향 전환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2050년경에는 세계적으로 대학의 5%만 남게 된다는 미래예측이 오래 전에 있었지만 우리의 대학행정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학들이 문을 닫는데도 안일한 그 관점으로 현재의 대입전형-대학수능시험을 그대로 유지하여 초중등교육을 좌지우지하겠다는 생각이라면 우습기 짝이 없다. 

우리 교육의 변화·발전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30만 명 중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은 누구인가를 알아보는 현재의 평가방법을 폐지해야 한다. 세부적인 입학전형을 샅샅이 파악해서 규칙을 위반한 극소수 학생 때문에 공정성이 무너졌다는 논리를 내세워 오히려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고 획일화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의 30만 명을 다 성공시키기 위한, 그 30만 명에게 개인별로 가장 적절한, 학생 하나하나를 최대한으로 배려하는 평가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교사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적절한 지도방법을 적용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전체적·획일적인 교육은 포기해야 마땅하다. 현재의 교육은 학생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학교행정의 편의를 우선하는, 전국적인 교육행정이 최선의 가치가 되는, 공장·회사 운영 시스템에 맞추는 교육이었으므로 이런 교육을 탈피해야 한다. 등교시간을 전국적으로 통일하고 있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수업시간을 획일화하여 통제하는 건 무엇 때문인가? 같은 학교에서 같은 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같은 과목을 같은 교과서로 공부해야 하는 건 누구의 편의를 위한 것인가?

옛날얘기가 되었으니까 20여 년 전으로 해두자. 학교를 많이 다니지는 않았다는 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렇지만 교육을 그만큼 알기는 쉽지 않다고도 했다. 어느 봄날, 그 지도자가 저 꽃다운 학생들에게 공부를 혹독하게만 시킬 것이 아니라, 오전에는 영·수·국 등 주요 과목을 배우게 하고 오후에는 학교에서든 지역사회에서든 개인별로 한두 가지씩 좋아하는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교육행정 전문가들은 즉시 ‘방과후학교’로 현재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해버리고 혹독한 공부를 더욱더 강화했다.

몇몇 사람은 그 제안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그렇게 쉽고 좋은 일을… 아예 명령을 할 것이지…”). 이제 그런 ‘제안’이 있으면 일단 부정하고 보자는 생각 좀 버리고 저 소중한 우리 학생들이 살아갈 미래를 짐작해보며 ‘적극’ 수용하자. 우리에게 좋은 일은 우리 아니면 해줄 사람이 없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