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말, 나는 정순겸의 그림에 대해 '손으로 희망을 선사하는 화가 정순겸'이라고 평했다.

 

"손으로의 희망을 선사하는 화가 정순겸은 손이 하는 일에 대한 우리의 엄청난 욕망을 누르라 감히 얘기합니다.

소유에 대한 욕망을 누르라고 말합니다.

가능한 일은 모든 손에서 나와 머리가 하는 일을 더욱 더 압박합니다.

심지어 물욕을 버리라고 심지 돋우며 손의 부단함을 역설합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손끝보다는 머리에만 신경을 너무 곤두세웁니다.

물욕에 대한 조용한 항거입니다.

검은 바탕의 흑물질에서 손은 우주를 유영하듯 손에 대한 강한 물음을 던집니다.

그동안 우리가 봉사한 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좌절하는 자들은 모든 손의 회복을 믿지 못하는 무력한 자들입니다.

특히 신앙에만 안주하는 자들과는 생각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 일은 무엇이고 불가능한 일은 무엇입니까.

손을 들어 세상의 온갖 것을 드러내 놓고싶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랑에 전혀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자가 어떻게 실연을 알며, 그 쾌락을 알겠습니까.

살아온 생애에 대한 짧은 단상, 촉감까지도 달콤한 사랑의 제스처도 전혀 모르는 부귀영화가 다 손 안으로 들어온다한들. 

그러나 그 부귀도 내 손으로 받을 수도 있지만 그녀의 손그림은 손끝을 따라가다 보면 수교의 직접적인 생명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고상한 손은 살아온 인생의 깊이를 느낄 수 없습니다.

손짓하나로도, 눈짓한 꺼플로도, 사랑을 안아보는 그 작은 품세도, 작은 몸짓하나로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느껴보려는 강도에 따라 그 삶의 규모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부지런한 손은 빠른 머리의 정신을 앞서 가는 실천적 실존의 주체입니다.

흰바탕의 손그림에 대한 질문은 알기쉬운 사람의 손은 몸짓보다 더 유연하며 푸른 날개짓보다도 더 크게 다가옵니다.

한손은 떠 받치고 한 손은 손짓 합니다.

손을 혹사시킨 것도 타락시킨 것도 그런 연유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너를 오늘날 있게 한 것도 손입니다.

따듯하게 나를 머무르게 한 것도 손에 의한 따스함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빛을 빛나게 한 것도 오늘날의 손입니다.

감성의 노력으로 다가선 울림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흐릿한 영상의 날개짓이여! 검은 카오스에서 탈출하라.

백색의 허공에 대고 털어내는 손의 유희는 지금 내 자신의 심심하고 흐리터븐한

살 떨리는 완벽한 우줏고리에서 떨어져나와 우유부단한 삶과 버려진 느릿한 노릇도 지금 우리에겐 필요치 않습니다.

다만 손의 회복을 주장하는 철학으로 사유하는 작가 정순겸의 겸허한 사랑의 메시지가 있어서 더욱 손길이 갑니다.

새벽에 씁니다."

김용문의 손에 대한 믿음은 오랜 숙련의 연마된 손의 힘을 믿는다.

생각보다 빠른 손가락 지두문의 유연성을  습득한다.

스마트폰을 누르는 손과는 다른 감각적 촉감이다. 물감의 물성을 따라 움직인 손의 자취는 정신의 회복을 의미한다. 정신성이 없는 AI가  알리 없다.

우리 신체를 타고도는 부단한 손의 마력은 우리 인류의 마지막 보루인지도 모른다.

부지런한 손의 마력은 정신을 앞서간다.

정순겸과 김용문의 손에 관한 보고서는 인류에게 너무 늦게 보내는 보고서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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