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5주년 3‧1절 늦은 오전에 베란다에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끄러웠는데도 어정거리다가 잊었고 해질녘에 다시 알았다. 나는 짧게 후회하다가 왜 어정거렸는지 궁금하였다. 변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늦게 무슨 의무를 이행하려는 듯한 내게 나는 은근히 반감을 가졌고, 또 이런 못난 자신이 싫어진 것 같았다. 며칠 지나, 해야 할 일을 제 때 하지 못한 뒤틀린 후과(後果)도 잊었다가 한 문학지의 해외시 특집기획에서 다음 시를 발견하였다. 낯선 일본의 시인 다카하시 무쓰오(高橋睦郞 : 1937〜 )가 쓴 「나의 이름은」(한성례 역). 반감 비슷하게 대충 읽다가 문득 계면쩍어하면서 다시 읽었다.        

 

나의 이름은 죽음을 먹는 자 

새로운 불행의 냄새를 예리하게 맡는 자

상갓집으로 재빨리 다가가 죽은 자의 살을 탐하고 

원치는 않지만 큰소리로 탄식의 소리를 내지르는 자

나는 양수 속에서 탯줄에 연결되어

밤낮으로 안에서부터 어머니를 갉아먹고

피투성이 산도를 뚫고 세상에 나왔다.

아버지는 이미 잃었다

친족이나 혈족도 처음부터 끊어져 있었다.

요람도 유모차도 없고 배내옷조차 없었다.

입에 물려준 유방에 지저분한 손톱을 세우고

젖꼭지를 물어뜯으며 피가 섞인 젖을 빨았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놀라서 떼어내어 내던졌다

내 나이는 미상이라기보다는 부정확하다

0세이면서 100세,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백발의 주름투성이인 내가 갓난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내지르고 있다

나를 찾는다면 온갖 임종의 침상

빈사자를 둘러싸고 슬퍼하는 가족에 섞여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낯선 자

나는 항상 죽음에 목마른 자

멸망에 대한 굶주림으로 계속 괴로워하는 자

스스로 죽기를 거부당한 불길한 자 

 

 ‘나의 이름은 죽음을 먹는 자’라 해서 죽음을 적대하며 먹어치우듯 극복하는 자인가 여겼는데, 죽음을 먹어야 하는 자, 남의 죽음을 에너지로 삼는 생리의 사신(死神)이다, ‘나’는. 

 ‘상갓집으로 재빨리 다가가 죽은 자의 살을 탐하’지만, ‘원치는 않지만 큰소리로 탄식의 소리를 내지르’기도 한다는데, 이 ‘탄식’이 위선인지 진정인지, 진정이라면 죽는 자에겐지 자신에겐지 애매한 가운데, 그는 단박 자신의 정체를 밝힌 성격대로, 우리가 궁금해 하거나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탄생 사정을 진술한다. 5행부터 13행까지, 위악도 거짓도 아닌 듯. 다소 길지만 우리는 기피하지 않고 그런대로 경청하다가 혐오하기보다는 어느덧 동정하게도 된다.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아버지를 잃었고, 친족도 혈족도 없는 사고무친(四顧無親)에다, 요람과 유모차는커녕 배내옷도 입지 못하고, 어머니에게서조차 버려졌었다니. 그래서 ‘백발의 주름투성이인 내가 갓난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내지르고 있다’는 괴상하고 처절한 비탄을, ‘지저분한 손톱’으로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어뜯’으며 ‘피가 섞인 젖을 빨’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만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우리 모두가 외면하고 격절하고 싶은, 다시 말해 죽음이 있어야 존재하는 사신. 그런데 이 각성도, 이어지는 ‘빈사자를 둘러싸고 슬퍼하는 가족에 섞여/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낯선 자’라는 토로를 마주하면, 마치 투명 인간처럼 소외된 외롭디 외로운 자의 독백처럼 들리면서, 우리는 다시 동정의 정서를 억누르기 어려워 당황해진다. 어쨌거나 그는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기다리고 달가워하고, 아니 유도하고 재촉하는 자가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혼란과 의혹은 끝 세 행 단락, ‘나는 항상 죽음에 목마른 자/멸망에 대한 굶주림으로 계속 괴로워하는 자/스스로 죽기를 거부당한 불길한 자’에서 무력해진다. 췌언이지만 이제 보니 놀랍게도 사신(死神)인 그는 늘 죽고 싶어 하는 자이며, 죽음을 먹고 먹지만 늘 기아로 고통을 겪고 겪는 자이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죽기를 거부당한 불길한 자’로 절망하는 자이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이질(異質)의 동정을 출몰시키고 드디어 오히려 그 정서를 더 크게 자아내는 형상화를 진행한 시인의 의도가 궁금하기도 하다. 다를지 모르겠으나 이 시는 결국 우리 인간의 숙명인 죽음을 또 성찰하게 한다. 인생은 자연의 한 편린, 그래서 죽음은 낙엽귀근(落葉歸根)과 같다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그 누구도 회피하고 싶은 죽음. 그러니까 이 시에는 우리로 하여금 화자와는 다른 취지에서 그 ‘죽음을 먹는 자’로 추동하는 기운이 있다. 우리는 ‘스스로 죽기를 거부당한 불길한 자’가 아닌 것이다.          

 사족 : 다시 시인의 의도가 궁금하고 해서 미안하지만 참지 못하고 시인에게 묻는다. ‘나’를 일제(日帝)와 일제를 비호하는 현재 일본의 극우세력으로도 간주하고, 관련 진술을 혹 그 언행의 바닥 저층에 도사려져 있는 양심의 토로로 들어도 되는지. 시인은 어떤 대답도 가능하다. 1937년생 서민 출신 시인에게 무슨 관련 죄업이 있으리. 그래도 일제 식민지배와 그 전후 시기 역사의식에 새겨진 우리의 원념(怨念)과 피해의식을 떠올린다면, ‘0세이면서 100세,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는 ‘나’를 화자로 내세운 시인은 아마 한참 생각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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