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역사 중 1960~70년대는 도시발전을 위해 심호흡을 고르는 시기와도 같았다. 서울 근교의 딸기밭으로만 유명했던 도시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특히 경기도청의 수원이전과 삼성전자 공장 유치, 화성복원사업 등이 현재의 초석을 다지는 밑거름이 됐다.

● 5·16 군사정변

민주주의 발전의 계기가 된 4·19의 의미도 잠시, 1961년 5월 16일 새벽 KBS는 국민에게 충격적인 방송을 했다. 군사혁명이 일어나 일체의 통치권을 군이 장악했다는 보도였다. 이틀 후인 5월 18일 당시 장 면 국무총리가 국무위원들과 함께 육국참모총장이 선포한 비상계엄령의 추인과 국무총리 총사퇴를 의결함으로써 5·16 군사정변은 기정사실화됐다.

비상계엄은 1년 6개월 만에 해제되고 제5대 대통령선거가 1962년 10월 15일 시행됐다.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민정당 윤보선 후보가 경합한 결과 박정희 후보가 총 1천103만 표 중 470만 2천여 표를 획득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윤보선 후보는 454만여 표를 얻어 표차가 15만 표였다. 한편, 4만 7천841명이 투표에 참여한 수원에서는 박정희 후보 1만 2천734표, 윤보선 후보 2만 9천303표를 각각 얻어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 후보보다 무려 1만 6천569표나 앞서는 이변이 연출됐다.

● 경기도청 수원이전

경기도청의 수원이전이 결정 난 것은 1963년 12월 10일이었다. 수원이전이 결정되기 전까지 도내 제1도시인 인천으로의 유치가 예상됐지만 수원출신 국회의원 이병희 씨를 필두로 수원시장, 각 기관장, 유지 등이 망라된 ‘경기도청수원유치추진위원회’가 강력한 활동을 펼친 덕에 수원으로 이전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병희 의원은 삭발을 단행하기도 했다.

이병희 의원의 초대 비서관을 지낸 현 수원상공회의소 우봉제 회장은 “경기도청 수원이전은 전적으로 이병희 의원의 힘이었다”며 “수원시민들이 수원으로 이전해 달라고 데모를 한 것도 아니고 배후에 도청추진위원회가 구성돼있었지만 직접적인 행동은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전이 확정된 후인 12월 15일 수원시민 3만여 명은 매산초등학교에 모여 도청유치 실현 환영대회를 개최하는 등 시내는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반대로 인천에서는 시민들이 가두로 뛰쳐나와 궐기대회를 여는 등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한편, 1962년에는 1906년 설립된 권업모범장을 모태로 한 농촌진흥청이 발족했다. 농진청은 일제시대 농림학교를 전신으로 하는 서울대 농대와 함께 농업과학기술 진흥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 계속되는 비행기 악재

1960년 9월 8일 수원시 동방 10마일 지점 상공에서 훈련 중이던 제트기 1대가 기체고장으로 추락하는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조종사는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사고원인은 군사원조로 한국 공군에 제공된 제트기가 노후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1967년 7월 10일에는 고색동에 제트기가 추락해 모두 7명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는 인근 비행장에서 이륙한 제트기가 이륙 직후 급작스런 기관고장을 일으켜 추락하면서 일어났다. 추락한 비행기는 일단 밭으로 떨어졌으나 강한 반동으로 재차 고색동 15번지 강 모 씨의 집을 덮쳐 일가족 6명과 조종사 1명이 죽는 참사가 빚어졌다.

한편, 1961년 11월 6·25 당시 폭격으로 파괴됐던 수원역사(驛舍)가 착공된 지 8개월 만에 준공식을 했다. 1962년 8월에는 복지사업 일환으로 광교저수지 제방 밑에 건립 중이던 수원풀장과 유원지가 완공돼 개장식을 거행했다.

또 1964년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의료시설을 갖춘 종합의료원(現 성빈센트병원)이 당시 서독 천주교구의 ‘원선씨오회’ 재단에 의해 수원에 설치키로 결정돼 지동 93번지 대지 2만여 평을 확보하고 부지 정지공사에 들어갔다.

● 삼성전자 공장 유치

1968년 12월 21일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중 서울~수원 구간의 개통이 이뤄졌다. 경수고속도로는 경부 간 425㎞ 중 우선 수원까지 24.8㎞의 도로를 개통한 것으로 서울과 수원 거리를 약 13분대로 단축하게 됐다. 경수고속도로 개통과 더불어 1969년 삼성전자 공장의 수원 유치는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영향을 미쳐 1970년대 수원의 도시화를 앞당기는 기폭제가 됐다.

당시 삼성전자 공장의 수원유치에도 이병희 의원의 공이 컸다고 한다. 우봉제 수원상공회의소 회장의 증언이다.

“삼성전자 공장이 서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유치된다고 하자 이병희 의원이 나섰다. 삼성전자 수원 유치 운동본부도 만들었다. 이병희 의원이 이병철 삼성 회장한테 삼성전자를 수원에 유치토록 해달라고 하자 이병희 회장이 좋다고 답했다. 이병희 의원과 이병철 회장하고의 친분관계가 삼성전자 공장의 수원유치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다.”

● 1970년대 도시화

삼성전자 수원공장은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이후 1975년 한일합섬과 1978년 선경화학㈜ 수원공장이 각각 설립되고 도시화가 본격화되면서 도시개발을 위한 토지구획정리사업도 활발히 이뤄졌다. 주요 구획정리사업은 영화지구 택지조성사업, 고화지구 택지조성사업, 역전지구 택지조성사업, 파송지구 택지조성사업으로 이들 지역에는 뒤에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주택, 상가가 들어서게 된다.

한편, 도시화에 따른 부작용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료에 따르면 1971년 수원시내 중심가인 종로사거리에서 교동 삼거리까지의 교통량이 날로 증가하면서 교통체증이 발생, 특정운수회사에게만 좌회전을 허용해 일반 운수업자들의 불평을 사기도 했다.

지역경제가 살아나고 인구가 증가하자 대학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1973년 아주대학교의 전신인 아주공업초급대학이 설립됐다. 1977년 김우중 씨가 학교법인 대우학원을 설립해 이를 인수했으며, 198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경기대학교도 1979년 수원캠퍼스를 조성하고, 1984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성균관대학교도 1979년 장안구 율전동에 자연과학캠퍼스를 신축했다.

● 화성복원사업 착수

1974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화성복원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축성당시 설계와 축성의 전후 시말에 대해 자세히 기록된 ‘화성성역의궤’가 남아있어 유구 등의 고증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었다. 당초 계획된 공사기간은 4년이었으나 마무리 과정에서 일부 지침의 변경과 토지매입, 철거 등으로 인해 공사기간이 지연돼 5년여가 소요됐다. 공사는 1975년 5월에 착공해 1979년 9월에 준공됐다. 공사에 동원된 인원만도 모두 7만 1천784명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에 무너졌던 서장대 복원도 1970년대 들어 이뤄졌다. 일설에 따르면 서장대가 무너진 이유는 일제시기 구름을 모으는 기계를 개발했다는 사람이 그 기계를 서장대에 갖다 뒀다가 그것을 작동시키면서 생긴 엄청난 진동 때문이었다. 이 같은 해괴함 탓인지 서장대 복원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1971년 준공도 하기 전에 그만 벼락을 맞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복원에 참여한 소목장 김순기 씨는 “준공도 안 됐는데 벼락을 맞자 기둥부터 갈았다. 불에 타 없어진 것을 다시 복원하는 일이다 보니 서장대 문을 처음으로 손으로 짰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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