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뫼는 화서역에서 천천주공아파트 방향으로 왼쪽에 있는 나지막한 동산으로 꼴미, 꽃미, 꼴뫼 등으로 불린다. 한자로는 화산(花山) 또는 화산(華山)이라 쓰인다. 이곳에는 순결을 지키려 몸부림치다 죽어간 여인의 애절한 사연이 있다.
꽃뫼에는 외양뿐 아니라 마음 씀씀이도 아름다운 한 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 처녀는 가세가 기울어 더 없이 어려운 살림에 병환 중인 아버지를 모시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 처녀는 오로지 늙으신 아버지께서 하루 빨리 병석에서 일어나시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러나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농사일과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하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버지와 의논해 머슴을 두기로 했다.
머슴을 두고나니 농사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힘센 머슴은 동네 사람들과 품앗이를 하면서 농사를 짓고 아버지의 병간호와 집안 일만을 하게 되니 살림도 나날이 나아졌다. 그런데 이 처녀를 한없이 괴롭히는 일이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뭇 사내들의 청혼이었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자결하겠다는 사내들이 줄지어 찾아와 청혼하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이 든 처녀로 시집가기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 병구완만을 생각해 언제나 냉정하게 사내들의 구애를 물리치곤 했다. ‘가문 좋고 돈 많은 집안의 미남인 신랑감과 혼인만 하면 아버님 병환도 낫도록 하고 호의 호식하며 잘 살텐데’ 하는 중매쟁이의 말도 다 물리치고 정성을 다해 아버지의 병구완에만 전심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환은 더욱 심해가기만 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는 이미 틀렸으니 너나 어서 좋은 데로 시집가서 잘 살아라”하니 처녀는 “아버님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저는 한시도 아버님 곁을 떠날 수가 없어요. 아버님 병환이 낫기 전에는 시집갈 생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하늘에서는 뇌성벽력이 대단했다. 억수같은 비가 몰아쳤다. 그때였다. 자기 집 머슴으로 둔 총각이 느닷없이 무서운 눈빛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집안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 처녀의 아리따운 자태에 항상 연모의 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머슴의 행동은 거칠었다. 여자의 몸으론 당해낼 수가 없었다. 우악스럽게 달려들어 처녀를 범하고 말았다.
머슴의 행동은 일시적인 충동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 처녀와 결합이 되면 그 집에서 눌러 살 작정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처녀는 가문의 전통으로 보나 순결로 보나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것이었다. 죽음으로 자신의 절개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병환이나 집안이 어떻게 되리라는 예측도 할 겨를 없이 그 길로 바로 집 뒤 조그만 산에 올라가 나뭇가지에 목을 매고 말았다.
이 처녀의 마지막 목소리는 애절했다.
“아버님 저는 어머님 계신 곳으로 먼저 갑니다. 아버님, 이 불효 막심한 여식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버님….”
처녀는 꽃다운 나이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은 이 처녀의 시신을 자결한 자리에 정성껏 묻어 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그 처녀의 무덤에서는 꽃나무가 자라났다. 마을 사람들은 생전에 그렇게 지성이었던 효심과 고운 마음씨가 꽃으로 환생한 것이라 믿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 무덤을 꽃뫼라 불렀으며 어느 사이 이 마을의 이름도 꽃뫼마을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한편 이곳은 1997년 수원시와 수원 대학교의 발굴 조사에서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제사 유적지임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는 이 마을 사람들이 추석을 전후해 이곳에서 동제를 올리기도 했다는 사실과 관련해 그 상징적 의미를 확보하는 것이다. 설화의 발생과 관련해 생각하면, 제사 유적지가 먼저 존재했고 후세에 그와 관련한 설화가 생성됐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마을이 철거되고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면서 마을도 동제도 사라지게 됐다.  <자료제공 = 수원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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