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수원의 역사문화 공간을 찾아서

수원박물관 한동민 학예팀장의 안내를 받아 매주 근대 수원의 문화공간을 찾아간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가던 길, 보던 건물 그리고 동네가 이젠 역사의 현장으로 재조명된다. 특히 굴곡 많은 근대 역사가 우리 삶의 터전 수원에서 어떻게 숨어서 있었는지 퍼즐게임처럼 하나 하나 맞춰나갈 예정이다.

● 수원로의 개설

정조 이래 순종 황제까지 6대에 걸쳐 조선후기의 모든 임금들은 수원을 찾았다. 다른 여타의 도시가 갖지 못하는 수원만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능행이 수원을 수원답게 만들었던 셈이다. 조선 후기 전국적 도로망 체계는 서울을 중심으로 6대로(大路), 혹은 10대로가 나타난다.

서울에서 동작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 남태령- 과천- 사근내- 지지대 고개를 넘어 수원을 거쳐 남쪽으로 가는 중요한 길이다. 수원의 주요한 통과지점은 지지대에서부터 화성행궁을 지나 매교를 거쳐 하류천- 대황교를 지나는 길이니, 이 길은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顯隆園)을 찾아가는 정조 임금의 필로였다.

특히 1795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과천- 남태령을 넘는 험한 길을 버리고 노들나루에서 시흥- 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오는 또 다른 큰 길을 새롭게 열었다. 이름하여 ‘수원별로(水原別路)’이니, 이후 정조 이후 모든 조선의 임금들이 찾았던 길이다. 수원을 거쳐 남쪽으로 가는 주요 간선도로가 됐고, 경부선 철로와 서울-목포간 1번 국도가 부설됐다. 하여 새로운 ‘수원로’의 개설은 이후 수원을 경기남부의 대도회지로 부상하게 만들었던 원동력이었고, 수원을 수원답게 만들었다.

▲ 수원시 향토유적 제5호(1986.4.8)로 지정된 미륵불.

● 지지대와 지지대비

서울에서 수원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인 지지대 고개는 수원을 가르는 경계지점이다. 지지대로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미륵당이 있어 미륵고개, 즉 미륵현(彌勒峴)으로 불렸던 곳이다. 수원시 향토유적 제5호(1986. 4. 8)로 지정된 미륵불이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지지대 고개에서 프랑스 참전기념비가 있는 옛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괴목정교를 지나면 시내 버스 종점이 나온다. 바로 그 버스종점 앞에 ‘법화당(法華堂)’이라는 이름이 걸려있는 전각 안에 미륵불이 안치돼 있다. 지지대 고개를 통해 수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안녕을 빌던 미륵불인 셈이다. 

정조는 현륭원을 참배하고 되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면 수원 땅이 보이지 않으니, 이 고개에서 어가를 멈췄다. ‘내가 이 고개를 넘어 한양 길로 접어들면 원소는 영영 멀어지는 구나’ 하고 머뭇거려 귀경길이 더디게 진행됐다. 이에 1795년 을묘년 원행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원래 고개이름을 늦을 ‘遲’자를 붙여서 ‘지지대(遲遲臺)’라 고쳐 부르게 했다.

이러한 사실을 적은 내용의 지지대비가 건립된 것은 1807년(순조 7)의 일이다. 화성어사 신현(申絢)의 주청에 따라 지지대비는 홍문관 제학 서영보(徐榮輔)가 글을 짓고, 판돈녕부사 윤사국(尹師國)이 글씨를 써서 지지대 고개에 세웠다. 지지대비로 올라가는 중간 돌계단에는 ‘遲〃臺’ 라는 글자를 새기고 하마비도 세웠다. 정조의 효성이 깃든 지지대 고개와 지지대비는 이렇게 수원을 상징하는 것이 됐다.

▲ 지지대비로 올라가는 중간 돌계단에는 '遲〃臺'라는 글자를 새기고 하마비도 세웠다.

 

▲ 지지대비는 1807(순조 7)에 건립됐다.

● 지지대 장승을 아십니까

지지대 고개에는 지지대비와 더불어 또 다른 이정표로 장승이 서 있었다. 이름하여 ‘지지대 장승’이다. 수원부의 초경(初境)으로 고개의 북쪽은 곧 광주(廣州)와 경계였기 때문에 고개 위에 초경임을 알리는 장승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파장동의 어르신들도 지지대 장승을 기억하는 분들은 없었다.

우리가 잘 아는 ‘변강쇠가’를 보면 천하 잡놈 변강쇠가 땔나무로 길가에 있는 장승들을 뽑아다가 불 때는 만행을 저지르자 지리산 함양 장승이 노들강변 선창목의 대방장승을 찾아가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다. 이에 대방장승이 크게 놀라 전국의 장승을 모이도록 하는데, ‘사근내 공원님’과 ‘지지대 유사님’를 모셔다가 논의를 하여 전국적인 장승들의 회의를 열었다는 것이다. 즉 대방장승과 사근내 장승 및 지지대 장승이 전국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승이었던 셈이다.

“통문 한 장은 진관천 공원이 맡아 경기 삼십사관, 충청도 오십사관, 차차 전케 하고, 한 장은 고양 홍제원 동관이 맡아 황해도 이십삼관, 평안도 삼십이관 차차 전케 하고, 한 장은 양주 다락원 동관이 맡아 강원도 이십륙관, 함경도 이십사관 차차 전케 하고, 한 장은 지지대 공원이 맡아 전라도 오십륙관, 경상도 칠십일관 차차로 전케 하라.”

이에 조선 각지의 장승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여 새남터에서부터 시흥 읍내까지 빽빽하게 모였다는 것이다. 지지대 장승은 전라도 56관을 총괄하는 장승임을 보여준다. 지지대 장승은 진관천·홍제원·다락원 장승과 더불어 그 중요성이 가장 크게 부각되고 있다.

사실 조선후기 수원은 장승의 땅이었다. 지지대 장승으로부터 현륭원 원소까지 5리마다 장승을 세웠는데 모두 11곳이었다. 즉 지지대 장승-일용리(日用里) 장승-기하동 장승-(화성행궁)-상류천(上柳川) 장승-재간현(才幹峴) 장승/ 만화현(萬和峴) 장승-건장동(建章洞) 장승-옹봉(甕峰) 장승-유첨현 장승-안녕리(安寧里) 장승-능원소 동구(陵園所洞口) 장승 등이다.

지지대에서 능소까지 5리마다 장승을 세웠던 수원은 장승의 천국이었다. 장승을 세운 장소에 대한 기록이 있고, 실제 그러했던 곳은 조선 천지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그 많던 장승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 지지대 장승으로부터 현륭원 원소까지 5리마다 장승을 세웠는데 모두 11곳이다.

● 지지대를 지켜라

1901년 4월 경부철도 노선을 잡으려 일본인들이 수원을 답사하며 표시를 하였을 때 수원사람들은 지지대 고개를 지키고자 했다. 즉 철도노선은 안양을 지나 지지대 고개를 뚫고 서문 밖으로 팔달산 뒤쪽을 관통하여 상유천- 대황교 동편을 지나는 노선이었다. 팔달산이 정조의 사당인 화령전(華寧殿)의 주산이고 지지대 역시 정조와 유서 깊은 유적으로 황실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땅이었고, 그 사이에 전답과 분묘가 많기 때문에 수원 지역민들의 반발은 거셌다.

이에 수원부민들은 남문 밖에서 모여 철도의 지지대 통과 반대시위를 벌였고, 대한제국 황실도 팔달산과 지지대의 훼손에 반대 입장이었다. 이에 철도원(鐵道院) 총재 유기환(兪箕煥)은 사그내-지지대 터널 공사에 반대해 군산포(軍山浦)-사시현(四時峴)-대대동(大垈洞)-서둔동(西屯洞)-상유천(上柳川)을 지나는 노선을 주장했다. 결국 경부철도 노선은 수원군민의 의지대로 수원읍치에서 서북쪽으로 에돌아 군포-부곡-수원역-병점으로 확정됐다. 지지대 터널을 뚫는 난공사를 피해 너른 평야지대를 관통하는 노선이므로 실제 일제의 처지에서도 손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경부선이 1905년 개통되면서 영등포-부곡-수원-병점-오산-진위-서정리-평택으로 이어지는 경부 철도의 노정을 따라 변화의 흐름이 밀려왔다. 그 거대한 흐름은 일본의 탐욕스런 자본과 경이로운 산업적 기술로 무장한 채 식민지적 수탈과 자본주의적 이윤의 극대화를 가져오는 무기였다.  

정조 이래 조선의 모든 국왕이 찾았던 수원은 지지대 고개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만석거-영화역-매교-상류천-하류천-대황교-안녕리-만년제를 거쳐 융릉과 건릉으로 가는 길이다. 정조 서거 이후 장헌세자(사도세자)의 현륭원과 정조의 건릉을 참배하는 것이었지만 그 능행으로 하여 수원의 정치적 위상과 문화적 역량을 강화하는 기제였다.

정조는 현륭원을 13번이나 찾았고, 이후 모든 국왕이 수원을 찾았지만, 마지막 순종황제의 1908년 능행은 이제 세상이 변했음을 보여준다. 순종황제의 능행은 기차를 타고 왔다 가는 하룻만의 능행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지대를 넘는 수원별로의 느릿하고 장엄한 능행은 이제 기차 길이 새롭게 열리면서 또 다른 시간과 속도로 수원을 훑고 지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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