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만제(서호)와 항미정

만석 쯤 되는 많은 소출을 바라는 의미에서 만석거(萬石渠)라는 이름을 붙인 저수지를 축조한 정조는 더욱 크게 만년(萬年)을 가는 조선을 축원하며 축만제(祝萬堤), 만년제(萬年堤)라는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 저수지에서 국가 경제의 근간이 되는 농사 개량과 수차(水車) 개발이 진행되었다.

1795년(정조 19)에 축조된 만석거는 서울로 오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던 탓에 축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명승지로 이름을 날렸다. 행궁으로부터 5리 지점인 만석거 옆에 영화정(迎華亭)을 만들었다. 이는 곧 오리정(五里亭)이자 교구정(交龜亭)으로 기능하였다. 한 고을을 떠나 외지로 가는 길목의 어간, 대개 5리쯤에 헤어지거나 쉬면서 숨고르는 공간을 마련한 것은 옛 사람들의 여유와 정취가 아닐 수 없다. 춘향전의 이도령과 성춘향의 이별 지점도 남원의 오리정이었으니, 헤어지는 사람들이 고을의 사또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5리 지점에서 신구 사또가 거북 모양의 관인(官印)을 교환하며 정보도 나누었다 하여 영화정은 ‘교구정(交龜亭)’이라 불렸다. 따라서 사람들은 만석거를 교구정 방죽이라 불렀고, 이후 조기정 방죽-조개정 방죽까지 갔으니 가도 너무 간 것이다. 어려운 한자 지명이 갖는 운명이니, 사람들의 입말에 와 닿지 않는 한자의 허황됨을 알만하다.

 

▲ 지금의 서호 전경.


4년 뒤인 1799년(정조 23) 조성된 축만제(祝萬堤)는 수원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호(西湖)라 불렸다. 만석거의 영화정이 명소가 되었지만 수원의 외곽에 위치한 규모가 큰 저수지였던 서호는 실질적인 농사에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1831년(순조 31) 수원유수 박기수(朴綺壽)가 축만제를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정자를 지어 ‘항미정(杭眉亭)’으로 명명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1831년 2월 21일 수원유수에 임명된 박기수는 이듬해 1832년 윤9월 4일 대사헌으로 이임, 11개월간 재임하면서 항미정을 창건하고, ‘화성지(華城誌)’를 편찬함으로써 수원지역의 중요한 자료를 남겼다.

▲ 일제 강점기의 항미정 모습.


● 권업모범장 그리고 농사시험장

약삭빠른 일본인들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경부선 기찻길을 내면서 주요한 기차역마다 넓은 땅을 강제로 수용하거나 값싸게 구입하면서 역세권을 만들어 손쉽게 막대한 부를 축적해갔다. 그러면서 수원의 서쪽, 여기산 아래 탁월한 조건을 갖춘 축만제와 서둔 벌판을 주목했다. 부산으로 손쉽게 실어 나를 수 있는 수원역이 가까운 이곳은 그들에게 축복의 땅으로 여겼다. 따라서 통감부는 1906년 4월 ‘권업모범장관제(勸業模範場官制)’를 발포하고, 6월 15일 서호에 권업모범장을 개설하였던 것이다.

‘농사시험’도 아니고 ‘권업모범’이라는 이름은 쓴 것은 일제의 의도를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초대 권업모범장장 혼다 고오스케(本田幸介)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일본식 농업방법을 이곳에서 실행하고 이를 조선인에게 보여주어서 개량에 노력하게 한다는 의미였다. 이는 러일전쟁을 승리한 이후 유리한 입지를 이용하여 최소의 비용으로 한국의 농업을 장악할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권업모범장이었다.

이 당시 창설된 수원 권업모범장의 규모는 총면적 87여 정보였다. 정리된 경작지는 북쪽의 서호와 남쪽의 신설된 도로, 서쪽의 서호천과 동쪽의 경부철도를 경계로 하는 광대한 땅이었다. 통감부가 추진한 권업모범장에 대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모범장을 이양해 줄 것을 요청하여, 1906년 11월 이양받았다. 이듬해인 1907년 3월 22일 ‘권업모범장관제’가 고종의 재가를 얻어 발포되면서 1907년 5월 15일 수원 권업모범장이 공식적으로 개장식을 거행하였다. 이는 고종황제의 강력한 의지의 반영으로 뒷날 농업개발이 국가적 재정확보의 중요한 영역임을 알았던 때문이다.

● 순종황제의 능행과 항미정

항미정은 권업모범장이 설치되면서 각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호젓한 서호를 고즈넉하게 바라볼 수 있는 정자의 존재는 기꺼운 것이 되었다.

더욱이 항미정은 순종황제가 쉬어 갔던 유서 깊은 정자이기도 하다. 고종 임금이 화성과 융릉 및 건릉을 참배한 이래 20여년 만에 순종황제가 수원을 찾았던 것은 1908년의 일이다. 1908년 10월 1일 건릉과 융릉에 나아가 친제(親祭)를 올리고 서호의 권업모범장을 순람하셨다. 이날 새벽 6시 궁궐을 출발하여 기차로 대황교(大皇橋) 임시정거장에 도착하여 건릉과 융릉에 제례를 드리고 점심 뒤 오후 대황교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서호(西湖) 임시정거장에 도착하여 축만제 방수로(放水路)를 따라 도보로 걸어가서 항미정에서 잠시 쉬셨다. 이후 권업모범장 방문기념으로 조선 소나무를 기념 식수를 하였다. 이듬해인 1909년(융희 3) 6월 1일 순종황제의 계비였던 순명효황후도 독자적으로 권업모범장을 순시하고 양잠(養蠶)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다.
그러나 1910년 국망에 따라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이 되었고, 1929년 권업모범장은 ‘농사시험장(農事試驗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매년 6월 14일을 ‘농민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였다. 즉 ‘농민데이’로 불렸던 그날은 조선총독을 비롯한 농림국장 등 관리들 다수가 농사시험장 시험답에서 모심기를 하곤 하였다. 농부 차림을 한 총독을 비롯한 관리들의 모내기 행사는 총독통치의 선정을 선전하는 것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농민데이는 권농일(勸農日)로 바뀌었고,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농촌진흥청을 찾아 모심기 행사를 가졌다. 녹색혁명으로 식량자급을 독려하던 때였다.

현재 농촌진흥청에는 혼다 고오스케(本田幸介)의 흉상을 세웠던 좌대와 권업모범장 표식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순종황제가 1908년 심은 소나무, 100년이 넘은 그 조선 소나무를 찾아 기념해야 할 것이다. 

● 수원의 명물과 명소

항미정이 건축된 이후 서호는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이후 수원8경 가운데 해질녘 석양이 드리운 서호의 아름다움을 일컫는 ‘서호낙조(西湖落照)’는 수원을 대표하는 명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항미정은 1986년 4월 8일 수원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수원의 아름다운 서호는 각 학교의 소풍 장소로 이름높았다. 수원사람치고 서호에서 사진 한 장 박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소나무가 서 있는 뚝방길을 따라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풍취의 발견은 일제강점기 수원이 낳은 여성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의 그림에도 여실하게 남아 있다. 정월 나혜석 또한 서호를 사랑하였고 스스로 서호를 그렸으니 ‘수원 서호’가 그것이다.

그러나 나혜석 이전에도 서호를 주요한 활동무대로 활용한 일군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소위 서울 유학생이거나 통학생들이었다. 하광교리 이득수(李得壽·19), 남창리 박선태(朴善泰·20·휘문학교 4년), 북수리 임순남(林順男·17·이화학당 여학생), 남수리 최문순(崔文順·17·이화학당), 산루리 이선경(李善卿·18·경기고녀) 등이 그들이다. 3·1운동을 전개하고 이후 구국민단(혈복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고무하는 내용의 신문과 창가집(唱歌集)을 배포하였다. 그들은 비밀회합의 장소로 서호와 항미정을 활용하였던 것이니, 또다른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셈이다. 항미정은 일제 우가키 총독과 소련의 유명한 식물학자 등이 찾아왔던 곳이기도 하지만, 서호와 항미정을 활용하여 비밀리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그들이 있었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1929년 차상찬은 수원의 명물로 물이 흔해서 집집마다 우물이 있는 것, 화령전의 작약, 서호의 붕어를 꼽고 있다. 물론 수원의 특징으로 고리대업과 축첩의 성행과 더불어 민둥산 많은 서울인근에서 나무 많은 것, 그 가운데 살구나무가 많다는 점을 특기하고 있다. 일제시기까지 수원의 명물로 서호의 붕어가 손꼽히고 있었다는 점이다. 실상 물반 고기반이었던 서호의 다양했던 어류는 1935년 일제 때 개수를 위해 물을 뺌으로써 이곳에 살던 서호만의 독특한 식생을 자랑하던 서호 납줄갱이가 멸종돼 버렸다는 점이다. 이로써 한국에서 서호 납줄갱이는 멸종 제1호 어류가 된 셈이다.

● 여기산 선사유적과 우장춘 박사 묘

서호에 백로가 우아하게 깃드는 세월 만큼이나 수원에 사람들이 일찍부터 살았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선사유적지가 여기산이다. 그래서 여기산은 이름만큼 아름답다.  그 여기산 기슭, 농업 진흥청이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곳에 우장춘(禹長春) 박사의 묘가 있다. 명성왕후를 시해한 친일파 아버지 우범선의 죄과를 갚고자 1950년 한국으로 귀국한 그였다. 한국의 육종학의 씨를 뿌린 그를 모르는 이들도 ‘씨 없는 수박’을 아느냐고 물으면 ‘아, 그 분!’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사실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의 또 다른 별명이기도 했다. 우장춘은 이외에도 척박한 강원도 땅에 맞는 ‘강원도 감자’를 육종시켜 강원도 특산물이 되도록 하였고, 제주도에는 ‘제주도 귤’이 열리도록 하였다. 또한 일본 재래종 채소와 양배추를 교배하여 우리 땅에서 잘 자라고 우리 입맛에 맞는 ‘한국 배추’를 만들어낸 분이다. 

불우와 고민 속에 진리를 토파내어 종자 합성 새 학설을 세계에 외칠 적에 학문의 바다 물결 한번 치리라.
우장춘 박사 묘 앞의 비문의 내용이다.

 한동민(수원박물관 학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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