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어진과 화령전 작약

정조의 어진을 모시다

 1801년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사당을 화성행궁 옆으로 튼실하게 건립하였다. 화령전(華寧殿)이다. 화성행궁 북쪽에 순조의 명에 의하여 건립된 화령전에는 정조의 어진이 봉안되었다. 이에 따라 화령전은 조선시대 내내 신성공간으로 존숭되어왔다. 화령전 경내에는  정전 운한각(雲漢閣)과 풍화당(風華堂) 등의 건물이 있었다. 운한각 편액은 순조(純祖)가 직접 쓴 어필이었다. 애당초 경부철도가 팔달산 쪽으로 노선을 확정했을 때 그 노선을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명분 가운데 하나가 화령전의 안녕이었다.  

지금의 세류동에 오랫동안 살았던 양성 이씨들은 수원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별효사(別驍士) 이응엽(李應燁)의 준호구에 따르면 할아버지 이만실(李萬實)이 화령전(華寧殿) 수문장(守門將)을 역임하였다. 당시 수원유수 민영위(閔泳緯)의 수결(手決)과 집안에서 부리던 막동(莫同)과 복동(卜同) 등 노비 이름도 함께 실려 있어 매우 흥미롭다. 화령전 수문장 이만실(李萬實)로 대표되는 양성 이씨는 수원부 남부 상류천(上柳川)과 독산리(禿山里) 일대에 거주하였다. 상류천과 독산리는 모두 지금의 세류동 지역이다.
화령전에는 운영과 관리를 총괄하는 화령전령(華寧殿令)과 경비를 담당하는 수문장(守門將) 등 두 직책이 가장 중요하였다. 따라서 화령전 수문장은 화성에 주둔하던 장용영(壯勇營) 외영의 군관(軍官) 중에서 뛰어난 인물을 선발했다. 따라서 화령전 수문장을 통하여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강화시켜갔음을 알 수 있다.
김명제(金明濟)가 1891년 10월 화령전 개수(修改)의 노고에 따라 6품으로 올랐다. 따라서 1891년 화령전의 대대적인 개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령전 개수 이후 20년이 채 되지 않는 시점인 1908년 정조 어진이 덕수궁 선원전(璿源殿)으로 이안(移安)되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래 일제에 대한 저항은 동시에 구한국 황실에 대한 민심의 이반을 동반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화령전 본전(本殿)에 수직관(守直官) 2원(員)을 두었다. 엄연히 나라에서 설치한 관직임에도 근래 대부분 늙어서 퇴직한 장리(將吏)로 군색하게 채워 넣을 뿐이었다. 따라서 수호(守護)하는 등의 일이 소홀함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홀함에 따라 일반 민인이 1907년 8월 2일(음력) 화령전 정전인 운한각의 합문을 칼로 뜯고 들어가는 변고가 생길 정도였다. 이러한 민심의 이반과 더불어 경기 지역 능원의 제향절차와 진전(진전) 합설을 통한 간소화가 논의됨에 따라 화령전을 비롯한 영희전(永禧殿), 목청전(穆淸殿), 냉천정(冷泉亭), 평락정(平樂亭), 성일헌(誠一軒)에 봉안된 어진이 덕수궁 선원전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에 1908년 9월 20일 화령전에 모셔져 있던 정조의 위패와 어진은 덕수궁 선원전으로 옮겼다. 이로써 화령전의 정조 어진은 1801년에서 1908년까지 108년간 봉안되었던 셈이다.

화령전의 파괴- 자혜의원 설치

▲ 한국전쟁 피란길에 정조어진은 불탔다. 현재는 이길범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이 걸려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 군대해산이 이루어지면서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신식 무기와 무자비한 탄압에 의해 의병전쟁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귀결되었다. 이에 넘쳐나는 일본군의 의료품을 활용하여 일본의 발달된 근대문명과 시혜를 선전하고자 각 지방에 자혜의원을 개설하고자 하였다. 이에 수원도 1910년 9월 5일 수원자혜의원을 개원하면서 화령전이 최종적으로 병원 원사로 결정되었다. 정조의 사당이었던 화령전이 비어 있다는 점과 규모가 적당한 점 등이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화령전이 자혜의원으로 바뀌었음은 조선이 멸망했음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화령전 정전인 운한각과 이안청을 제외하고 지금의 풍화당과 전사청 등 3동의 건물이 의원 병실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기구기계의 설비도 보잘 것 없어 겨우 더운 햇볕을 피하면서 가옥 옆에 노천진료를 하는 상황이었다. 점차 수비대(守備隊)의 약품이 공급되고 지방비를 충당하면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병실의 건물은 화령전의 부속건물을 사용함에 따라 공간이 너무 좁았다. 즉 서무과·약제과·진료과 및 숙직실의 건평은 겨우 61평, 갑(甲)병실은 20평, 을(乙)병실은 문간에 붙어 있는 11평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협소한 공간을 이유로 몇 년 뒤 수원자혜의원은 화성행궁의 봉수당으로 옮겨가게 된다. 화령전 정전을 사용하지 못하는 점과 병실의 협소함과 더불어 조선이 멸망한 상황에서 드넓은 화성행궁을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화성유수를 비롯한 수원판관, 중군 등의 화령전 봉심과 작헌례가 사라지고 화령전령과 화령전 수문장의 위엄이 사라지면서 조선은 역사 속으로 스러져갔다.
정조 어진이 없는 화령전은 이미 화령전이 아닌 것이다.

화령전 작약

화령전은 텅 빈 공간으로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멸망한 조선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어갔다. 운한각 앞 중문의 멋들어진 소나무가 사라지고 중정에는 작약(芍藥)이 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운한각 정전 앞에는 전에 없던 나무들이 심어졌고, 풍악소리 울려 퍼지는 공간으로 풍화당이 활용되었다. 조선 후기 모든 임금들에게 따라 배워야 정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신성한 공간은 이미 화석화된 공간으로 방치되어 갔던 것이다. 

화령전은 1934년 수원고적보승회(水原古蹟保勝會)에서 수리를 하게 되었다. 차재윤을 비롯한 수원의 일반인들이 주축이 된 수원고적보승회는 이미 1933년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및 화서문을 수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화령전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나혜석의 그림으로 알려진 ‘화령전 작약’이 있다. 화령전 작약은 일제강점기 수원의 명물로 서호의 붕어와 더불어 유명하게 되었다. 나혜석은 1935년 봄부터 1936년말까지 수원 지동에 거주하면서 그림과 함께 저술활동을 병행하였다. 프랑스 파리에서의 최린과 스캔들로 남편 김우영과 이혼한 나혜석은 고향 수원으로 낙향하여 심신을 추스르고자 하였다.

이 때 그린 그림으로 ‘서호’와 더불어 ‘화령전 작약’을 확인할 수 있다. 나혜석은 3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그린 다작의 전업작가였음에 비해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30여 점에 불과하다. 그나마 조선미전(선전)에 출품한 확실한 기준작들이 남아 있지 않다.

해방 되고 난 후 1949년 신풍동 사람들이 자진하여 직접 화령전을 중수하기도 하였다.

즉 수원 신풍동 동민들과 대한청년단원들이 솔선하여 화령전을 중수한 사실이 있다. 이는 해방 후 화령전이 귀국한 전재민과 노랑무당 등이 숙소로 사용하여 건물은 말할 나위 없이 파손되고 안팎의 잔디는 밭으로 갈아 부쳐 여지없이 황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풍동 구장 김원배(金元培)씨와 대한청년단 신풍동단부 단원들이 솔선하여 직접 작업에 참여함으로써 94평의 건물을 중수하게 된 것이다. 이에 수원시청에서 40만원의 비용을 제공하였고 화성군수는 화산의 목재를 주선하였고 성안의 고건축의 권위자인 대목장 임배근(任培根)씨가 참여하여 수리 공사는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이는 매일 1시간씩 연인원 600명이 동원되어 지난 9월 18일에 공사에 착수하여 11월 21일 준공을 보기까지 60일 동안 신풍동 사람들이 성심성의껏 봉사를 한 작업이었다.

▲ 1920년 화령전의 모습.

화령전의 힘

1908년 덕수궁 선원전으로 이안하였던 정조의 어진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그러나 정조 어진은 보관하던 창고에 불이 나서 5개의 어진과 함께 불타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슬픈 일이다. 현존하는 어진으로는 태조, 영조 및 반쯤 불탄 철종 어진 등 3개의 어진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물론 사진이 남아 있는 고종황제와 순종황제를 제외하고 말이다. 현재 화령전에는 이길범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인 정조 어진이 걸려 있다. 

조선시대 어진을 모셨던 숱한 진전들이 존재하였다. 정조 어진이 모셔져 있던 화령전은 조선 후기 가장 존중받던 사당 가운데 하나였다. 화령전이 존중되었던 100여년 동안 조선은 조선다운 면모를 지닐 수 있었다. 한편 그 100년간의 시기는 조선을 포함하여 세계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변화의 시기를 보여주었다. 즉  1800년 정조가 승하하면서 19세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세계사적으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자본주의 물결이 기계화와 더불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여 근대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한 나라들은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고,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식민지로 전락하였음을 세계사는 보여주고 있다.

정조 사후 조선은 근대적 격변기를 맞이하여 노론의 일부 가문,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벌열가문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세도정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변혁(홍경래 난, 진주민란, 동학농민전쟁)과 위로부터의 개혁(갑신정변, 갑오개혁)을 저지하면서 끝내 조선을 근대화에 실패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시대, 일제에 의한 식민지시대를 만들었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와 같은 신성공간은 아닐지라도 정조 어진이 다시 모셔진 화령전은 지금 살아 있는 문화공간인 셈이다. 

▲ 벚꽃이 만개한 화령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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