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궁을 파괴하고 병원을 세우다

올해는 경기도립의료원 수원병원이 설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오래된 병원에 대한 명칭과 기억은 사람들에 따라 수원의료원, 수원도립병원, 수원도립의원 혹은 수원자혜의원(慈惠醫院)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물리적 나이로 따져볼 때 자혜의원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1910년 8월 29일 강제합방을 강행한 일제는 조선인에게 자애로운 은혜를 베푼다는 미명 아래 전국의 주요 지역에 자혜의원이라는 것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급하게 개원된 각지의 자혜의원은 약품과 의사들이 태부족하였다. 이에 소용되는 약재 및 위생재료는 서울과 함경도 나남(羅南)의 육군 창고에 보관하던 것들이 보급되었고, 의사들 역시 육군 군의(軍醫)들로 충당되면서 병원의 구색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는 의병전쟁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뒤에 소용없게 된 넘쳐나는 군용 의약품과 군의들을 용도 변경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일제는 식민지 의료기관을 설치해 주었다는 시혜적 입장에 서 있었다. 일제는 불필요한 의약품의 소모와 의료기관을 통한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한 것이었지 조선의 일반인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식적으로 수원지역 최초의 근대적 공립의료기관이었다. 

일제가 수원에 자혜의원 자리로 첫 번째로 꼽았던 곳은 연무대였다. 그러나 읍내에서 거리가 멀고 난방시설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이에 다음으로 선택된 곳은 화령전이었다. 덕수궁 선원전으로 정조 어진을 이안하고 난 뒤 비어있는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1910년 9월 5일 수원 자혜의원이 화령전에서 개설되었다.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조선인의 민심이반을 두려워해서인지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에는 직접 설치하지 못하고 좌우의 부속건물을 병원으로 활용하였다. 즉 화령전 정전의 오른쪽 어정(御井) 앞의 전사청(典祀廳)과 그 부속건물 및 좌측의 풍화당(風化堂) 등 3동을 병원 건물로 활용한 것이다. 이에 풍화당은 1병실, 전사청은 서무·약제·치료과 및 숙직실로 사용하고, 문칸의 부속건물은 2병실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뚜껑이 없는 원통형의 우물이던 어정(御井)의 끊임없이 샘솟는 양질의 물은 음용수로 활용될 수 있었다. 

▲ 화성행궁 전경.

● 화성행궁의 변화와 자혜의원 설치

1910년 10월 화성행궁의 경기도관찰부가 서울로 이전되어 갔다. 이에 따라 노천진료를 할 정도로 협소하다는 이유로 화령전에 설치되었던 자혜의원을 옮기게 된다. 경기도 관찰부가 떠나감에 따라 일제는 화성행궁의 넓은 건물들을 주목하였다.

일제의 속마음은 화성행궁을 헐고 일제 통치기구를 거들먹하게 세우고 싶었겠지만 재정문제와 더불어 민심 이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기존의 화령전에 옹색하게 들어선 자혜의원을 드넓은 화성행궁으로 옮기고자 했던 것이다.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고 넓은 건물과 장소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과 동시에 수원의 중심적 행정기구를 근대적 의료기관으로 활용함으로써 조선의 멸망을 확연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화성행궁의 가장 중요한 정궁 역할을 하는 봉수당(奉壽堂)에 자혜의원을 설치함으로써 행궁의 건물을 이용함과 동시에 조선왕실의 권위와 그 표징이었던 화성행궁을 허무는 이중의 목적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황실 및 관청 건물에 대한 사용을 학교 또는 의료시설로 활용했던 일제의 고도의 술책은 군사적 위협과 더불어 발달한 일본의 근대적 신문명을 선전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이미 만들어진 건물을 사용함으로써 초기 투자비용을 줄이면서도 효과적인 선전이 가능하였던 셈이다.  

그러나 곧바로 활용하기는 어려워 청사를 병원 기능에 맞게 다시금 수리 개축하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11년 5월 28일 자혜의원은 화령전에서 화성행궁으로 옮겨 새롭게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화령전의 정전 운한각을 병원 건물로 사용하지 못했던 것에 비해 이번에는 화성행궁의 정전이던 봉수당을 병원의 본관으로 활용함으로써 조선의 몰락을 확연하게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이 때 좌익문과 봉수당 사이에 있었던 중문인 중양문(中陽門)을 효율성을 빙자하여 철거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이로써 화성의 심장이자 조선의 상징이었던 화성행궁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나라가 망한 마당에 화성행궁의 훼철은 어쩌면 마땅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경복궁이 철저히 훼철되어 조선총독부가 건립되는 양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 화성행궁 자리에 들어선 수원도립병원.


화성행궁의 훼철 과정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이미 신풍루 양 옆의 북군영과 집사청의 일부는 경찰서로 사용되었고, 남군영과 서리청 역시 헌병분견소와 그 숙사로 활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좌익문 남쪽의 비장청과 회랑은 시료부(施療部)·진찰소, 외정리소는 간호부 기숙사 및 시료실(施療室), 유여택 북쪽 회랑은 약품창고, 유여택 남쪽 회랑은 전염병실이 되었다. 좌익문과 중양문을 잇는 북쪽 회랑은 창고, 중양문과 봉수당을 잇는 북쪽 회랑은 내과병실이었다. 봉수당 옆의 경룡관과 유여택의 일부는 남병실(南病室)이었고, 장락당에는 진찰실 및 수술실이 위치해 있었다. 본관으로 활용된 봉수당은 서무과·진료과·약제과 등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봉수당에서 득중정으로 이어지는 회랑은 북병실(北病室)로 활용되었고, 봉수당 뒤쪽 득중정과 이어지는 서회랑은 병리시험실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낙남헌은 자혜의원과 상관이 없는 다른 용도의 건물로 활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자혜의원은 좌익문을 정문으로 하고 봉수당을 중심으로 좌우의 회랑을 양쪽으로 하는 구역 모두가 활용되었던 셈이다. 다만 신풍루 양 옆과 낙남헌 일대 및 반대편의 별주 지역만이 제외되었다. 

● 화성행궁의 파괴와 낙남헌

화성행궁의 건물을 재활용하며 운영되었던 자혜의원은 15년이 지난 즈음, 1925년 경기도립 수원의원으로 개칭되었다. 이미 수원자혜의원은 1923년 5월 화성행궁 봉수당을 헐어 3,751평의 대지에 총 공사비 78,000원을 들여 2층 벽돌 건물로 본관을 높다랗게 지었다. 그리고 주변의 행궁 건물들을 훼철하고 763여 평의 건물을 새롭게 지었다.

그리고 이후 1928년 남병동(南病棟) 49평(목조)과 1935년 서병동(西病棟) 25평(연와조)을 증축함으로써, 1923년 이래 병원 확장은 화성행궁 정당인 봉수당을 비롯한 장락당·유여택·복내당 등을 헐어내고 새로운 건축물들을 신축한 것이었다. 이는 조선 왕조의 상징적 건축물인 화성행궁을 헐어내고 일본의 힘과 우월성을 선전하는 도구로써 근대적 병원이 완성되어 갔다.

결국 화성행궁은 일제 강점기 수원경찰서 및 토목관구 그리고 신풍공립소학교 및 수원자혜의원 등이 설립되면서 일제 통치를 옹호하는 주요한 기구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는 조선의 몰락을 온전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으로 576칸 규모의 화성행궁 가운데 유일하게 낙남헌(落南軒)만을 남긴 채 왜소한 조선식 단층건물과 높은 근대적 병원 건축물을 배치함으로 우월한 일본을 은연중 과시하며 조선인에게 열등감을 자아내게 했던 기제로 활용하였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임시 머물던 별궁(別宮), 이궁(離宮)으로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다. 왕이 항상 머무르며 국사를 주관하는 본 궁궐(正宮)을 나와 전란·휴양·왕릉 참배 등 지방에 머물 때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이 가운데 화성행궁은 화성의 중심으로 조선시대 행궁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행궁은 평상시에는 수원부사(화성유수)가 집무하는 지방행정의 관아로 사용하다가 왕의 원행 때에는 왕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정조 이래 모든 임금이 찾았던 화성행궁은 다른 지방의 행궁보다 그 규모나 건축구조·기능면에서 압도적이었던 조선의 상징이었다.

  전통적 한옥의 가옥구조는 넓은 마당과 함께 해야 온전하게 그 맛과 멋을 음미할 수 있다. 단층의 한옥은 넓은 마당과 어울려야 그 단단한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덩그렇게 낙남헌 하나만을 남기고 모조리 헐어버렸다. 따라서 덜렁 남겨진 낙남헌과 높다란 벽돌 건물의 자혜의원은 초라하고 낙후된 조선과 발전하고 위용에 찬 일본을 의연 중에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일제는 일본인보다 높은 문화의식과 자부심을 지닌 조선인들을 폭력과 무력으로는 굴복시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보다 발달된 물질문명을 조선의 그것과 비교하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우월한 일본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시나브로 조선인들의 저항을 무마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경찰과 군대와 사뭇 다른 또 다른 일제 통치의 유효한 무기가 교육과 의료를 통한 통치방침과 연결된다. 하여 그렇게 남겨진 낙남헌은 일제시기 수원군청(水原郡廳)으로 활용되면서 힘겹게 조선을 지켰던 셈이다. 해방 뒤에는 신풍학교 교무실로도 사용되었다.

1989년 10월 화성행궁복원추진회(추진위원장 김동휘)가 구성되어 행궁복원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알려나갔다. 이에 따라 수원의료원이 정자동으로 신축이전 되었고, 1996년 7월 19일 화성행궁 중건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렇게 낙남헌은 수원자혜의원이 1911년 5월부터 화성행궁 자리를 차지한 이후 1992년 정자동에 의료원을 신축하여 이전하기 전까지 82년 동안 화성행궁을 홀로 씩씩하게 지켰던 것이다.

봉수당 등이 중건된 화성행궁에서 낙남헌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 봉수당에서 혜경궁홍씨 진찬연이 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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