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학지광에 ‘잡감’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사회에서 여자를 불신하고, 남자가 여자를 모욕하는 것은 여자의 사업(事業)이 어리고, 자각이 없고, 성공이 더디고 사물에 어둡고 처리가 둔하고 실패가 많은 것은 전혀 확고한 신념이 결핍하고 이지적 해결력이 빈약하였던 까닭 같소. 이 결점이 사람 이하의 금일(今日) 여자의 현상을 지배하는 것 같소. 여자가 사람 이하의 대접을 받는 오늘날의 현상은 여자 스스로의 깨달음이 부족한 탓’이라는 내용이다. 

이 글은 이어 나혜석 자신이 기숙사에서 선배 언니에게 했던 말이라며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우리 조선 여자도 인제는 그만 사람 같이 좀 돼봐야만 할 것 아니오. 여자다운 여자가 되어야만 할 것 아니오? 미국 여자는 이성(理性)과 철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프랑스 여자는 과학과 예술로 여자다운 여자요, 독일 여자는 용기와 노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그런데 우리는 인제서야 겨우 여자다운 여자의 제1보를 밟는다 하면 이 너무 늦지 않소?  우리의 비운(悲運)은 너무 참혹하오 그려.”

● 여자도 사람이외다

1918년 9월 여자계 2호에 실린 두 번째 소설 ‘경희’에서는  ‘…어찌하려고 그런 대담한 대답을 했나 하고, 어버지가 “계집애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잘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니라” 하실 때에 “그것은 옛날 말이에요. 지금은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이상에는 못할 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에요” 하던 생각을 하며 아버지가 담뱃대를 드시고 “뭐 어쩌고 어째? 네까짓 계집애가 하긴 무얼 해. 일본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귀한 돈 없애고 그까짓 엉뚱한 소리만 배워가지고 왔어?” 하시던 무서운 눈을 생각하며 몸을 흠찔한다.’라는 나혜석의 사연이 실렸다.

나혜석은 이렇게 ‘여자도 사람이외다’라고 항변했다. 나혜석은 첫애인 소월 최승구가 27세 때 폐결핵으로 사망하면서 방황한다. 최승구는 당시 천재시인이었다. 그의 ‘벨지움의 용사’는 조선의 용사를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혜석의 호 정월은 최승구의 호 소월과 연관된다. 이 시대의 우리는 ‘진달래 꽃’의 시인 소월 김정식은 알아도 소월 최승구는 잘 모른다. 최승구의 가까운 친구 중 시인 안서 김억이 오산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 김정식의 시 솜씨를 보고 너도 감탄해 최승구 같이 훌륭한 시인이 되라고 하며 최승구의 호 소월을 김정식에게 준 것이다.

나혜석은 또 정조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배고프면 밥 먹고 배부르면 안 먹고, 떡 먹고 싶으면 떡 먹고 싫으면 안 먹듯이, 섹스란 생각 있으면 하고 생각 없으면 안 하는 것이다. 공연히 남자들이 여자들을 옭아매 두려고 정조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혜석은 또 정조를 요구할 수 있는 남성은 정조를 지킨 남자에 한한다고 했다. 이 시대에도 어느 여성유명인사가 이 같은 발언과 글을 썼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 나혜석은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나혜석을 가리켜 흔히들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1896년 꽃피고 새들의 지저귐이 한창인 4월 28일 이곳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나 그 화려한 시절을 거쳐 1948년 눈보라치고 삭풍이 몰아치던 12월 10일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무연고자 병동에서 운명했다 해서다. 그것도 사망한지 다음해 관보에 기록되고 지금 이 시간까지 그의 무덤마저 알 길이 없는데서 더욱 그렇다.

세속적인 삶은 파멸이었을망정 자기시대를 가장 정직하게 살다간 정월 나혜석은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니체가 비극은 가장 비극적인 결말일 때 패배가 아닌 승리라고 했음은 일찍이 나혜석을 두고 한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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