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어 나혜석 자신이 기숙사에서 선배 언니에게 했던 말이라며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우리 조선 여자도 인제는 그만 사람 같이 좀 돼봐야만 할 것 아니오. 여자다운 여자가 되어야만 할 것 아니오? 미국 여자는 이성(理性)과 철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프랑스 여자는 과학과 예술로 여자다운 여자요, 독일 여자는 용기와 노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그런데 우리는 인제서야 겨우 여자다운 여자의 제1보를 밟는다 하면 이 너무 늦지 않소? 우리의 비운(悲運)은 너무 참혹하오 그려.”
● 여자도 사람이외다
1918년 9월 여자계 2호에 실린 두 번째 소설 ‘경희’에서는 ‘…어찌하려고 그런 대담한 대답을 했나 하고, 어버지가 “계집애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잘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니라” 하실 때에 “그것은 옛날 말이에요. 지금은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이상에는 못할 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에요” 하던 생각을 하며 아버지가 담뱃대를 드시고 “뭐 어쩌고 어째? 네까짓 계집애가 하긴 무얼 해. 일본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귀한 돈 없애고 그까짓 엉뚱한 소리만 배워가지고 왔어?” 하시던 무서운 눈을 생각하며 몸을 흠찔한다.’라는 나혜석의 사연이 실렸다.
나혜석은 이렇게 ‘여자도 사람이외다’라고 항변했다. 나혜석은 첫애인 소월 최승구가 27세 때 폐결핵으로 사망하면서 방황한다. 최승구는 당시 천재시인이었다. 그의 ‘벨지움의 용사’는 조선의 용사를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혜석의 호 정월은 최승구의 호 소월과 연관된다. 이 시대의 우리는 ‘진달래 꽃’의 시인 소월 김정식은 알아도 소월 최승구는 잘 모른다. 최승구의 가까운 친구 중 시인 안서 김억이 오산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 김정식의 시 솜씨를 보고 너도 감탄해 최승구 같이 훌륭한 시인이 되라고 하며 최승구의 호 소월을 김정식에게 준 것이다.
나혜석은 또 정조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배고프면 밥 먹고 배부르면 안 먹고, 떡 먹고 싶으면 떡 먹고 싫으면 안 먹듯이, 섹스란 생각 있으면 하고 생각 없으면 안 하는 것이다. 공연히 남자들이 여자들을 옭아매 두려고 정조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혜석은 또 정조를 요구할 수 있는 남성은 정조를 지킨 남자에 한한다고 했다. 이 시대에도 어느 여성유명인사가 이 같은 발언과 글을 썼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 나혜석은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나혜석을 가리켜 흔히들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1896년 꽃피고 새들의 지저귐이 한창인 4월 28일 이곳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나 그 화려한 시절을 거쳐 1948년 눈보라치고 삭풍이 몰아치던 12월 10일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무연고자 병동에서 운명했다 해서다. 그것도 사망한지 다음해 관보에 기록되고 지금 이 시간까지 그의 무덤마저 알 길이 없는데서 더욱 그렇다.
세속적인 삶은 파멸이었을망정 자기시대를 가장 정직하게 살다간 정월 나혜석은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니체가 비극은 가장 비극적인 결말일 때 패배가 아닌 승리라고 했음은 일찍이 나혜석을 두고 한말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