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혁명으로 세워진 정부는 온건파 정부였다. 억압당했던 피치자들의 요구는 일시에 분출됐다. 그러나 그것은 통치의 형태와는 달랐다. 통치는 통합적이었다. 그리고 획일적이었다. 그러나 욕구의 분출은 다양했다. 그리고 사상과 행동이 분열됐다. 혁명 후의 양상은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억압을 받으면서 혁명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세계가 아니다. 그래서 혁명 뒤에는 쿠테타를 통해 혼란과 무질서가 정리되곤 했다. 혁명 뒤의 쿠테타는 정치발전의 한 모델을 이룩하고 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은 장로파와 독립파가 대립된 상태에서 진행됐다. 전자는 주로 대상인과 지주로 구성돼 있어 처음에는 국왕에 반대했으나 뒤에는 국왕과 통하며 그와 타협했다.

온건파의 지배다. 후자는 크롬웰의 기반이 된 저항파로서 1649년 4월 수평파가 병사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다. 이것이 청교도 혁명 뒤의 쿠테타인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경우는 나폴레옹이 쿠테타에 성공했다. 그것도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초래된 혼란과 무질서를 진압했다는 의의가 있다.

1772년에 성립한 국민공회는 750명의 의원 중 우파인 지롱드 당원이 35% 좌파인 산악당이 약 30%, 중립파인 평원당이 약 35%였다. 이러한 좌우 양파는 숙청당하고 공포정치를 시행했던 로베스피에르가 데르미도르반동으로 처형된 후, 국민공회의 부르지아지 성격에 흥분한 파리 민중은 의회를 습격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캄포포르마르미오조약으로 명성이 높았던 나폴레옹이 1777년 쿠테타에 성공했다.

미국 독립혁명의 경우는 1777년 대륙회의에 의해 결의된 연합규약은 1781년부터 발표돼지고 명칭은 아메리카합중국으로 됐으나, 중앙기관으로서는 행정기관이나 사법기관도 없고, 연합의회만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789년 G.워싱턴이 대통령이 됐다. 비록 의회에서 선출했다고 하나 독립군사령관이 군을 배경으로 대통령자리를 차지한 쿠테타로 성격짓는다. 러시아의 경우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일컬어지는데, 정권은 멘세비키가 잡았지만 블서비키혁명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있어 이른바 ‘이중주권’ 시대로 혼란이 극심할 때, 레닌이 쿠테타로 성공하고 그가 곧 타계하자 스탈린의 독재정치로 이어졌다.

우리는 위에서 본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의 쿠테타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시민혁명에 이어서 등장한 온건파인 집권파를 뒤엎었다는 것. 둘째는, 온건파의 집권에 이은 무질서를 안정시켰다는 것. 셋째는, 좌파인 극단파를 억압했다는 것(러시아만이 예외다. 온건좌파를 극단파가 억압한 것이다. 넷째는, 제휴한 계층은 온건파였던 우파였고 사상과 정책은 보수적이었다는 것. 다섯째 형태는 민주공화제나 내용은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였다는 것이다.

5ㆍ16의 경우도 위 다섯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온건파 장면 민주당 정부를 군사 쿠테타로 전복시켰다. 둘째, 데모로 세운 나라 데모로 망한다의 평가가 나올 정도로 민주당 정부의 혼란과 무질서를 안정시켰다. 셋째, 이른바 진보노선의 좌파이념적인 혁신세력을 숙청했다. 넷째, 혁명의 이념과 제휴세력은 보수적이고 그 세력이었다. 다섯째, 헌법은 민주공화국을 명시했으나 내용은 군사독재였다.

우리는 5ㆍ16을 4ㆍ19 뒤의 반동으로 단정할 수 있다. 그러나 5ㆍ16에 대한 평가는 당시나 50년 뒤의 평가나 경제성장의 기초를 완수한 훌륭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5000년 내려온 보릿고개를 없애고 조국근대화 민족중흥의 역사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발전한다. 그러나 직선적인 것도 동질적인 것도 아니다.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발전한다. 노자의 무위자연설도 ‘전진하는 것보다 한번 멈추는 것이 멈추는 것보다 한 발자욱 물러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혁명은 정치발전의 원동력이다. 그 원동력 가운데 쿠테타와 독재정치를 겪으면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민주정치를 지향하는 국민의 힘이 있는 것인가 보다. 결국 5ㆍ16도 정치발전과정의 한 자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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