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를 중심으로 한 70여점의 유화가 출품된 개인 전시회는 서울에서 한국인 화가로 열리는 최초의 일이었던 만큼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한국인으로서는 2번째이고, 한국 여류 최초의 유화 개인전이었다. 한국 근대 미술사에 하나의 이정표와 같은 사건이었다. 같은 해 4월 3일 『매일신보』에는 자기 고백적인 시 「인형의 집」을 발표했다.

김우영과 결혼한 이후 1927년부터 16개월에 걸친 유럽여행은 서양화가 나혜석에게 또 다른 미술 흐름을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먼저 귀국한 남편보다 1년간 더 프랑스 파리에 남아 있던 나혜석은 당시 중추원 참의였고 언론사 사장이었던 최린과의 염문설로 이혼을 당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나혜석은 이러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게재해 부조리한 가부장적 가치에 대해 저항했다. 그러나 이후 최후의 100여점의 개인전에 대한 평단과 대중의 싸늘한 반응에 직면해 붓을 놓은 채 수덕사와 마곡사 등을 전전하며 정처없는 유랑의 길에 올랐다. 행려병자가 돼 용산에 있는 시립병원 자제원(慈濟院)의 무연고자 병동에서 1948년 12월 10일 홀로 숨을 거뒀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칼럼니스트요,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나혜석은 여성권익과 여성운동의 사상을 끊임없이 작품을 통해 표현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부도덕함이나 욕심과 허영의 형태가 아니라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과 그 고뇌속에서 행복한 삶을 구사하려는 노력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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