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장관의 친딸 특혜논란, 국새의 제작 의혹과 로비설, 유명 연예인의 외국 도박설, 몸에 걸친 액세서리만 4억원이라고 주장했다는 명품녀 진실공방 등…. 하늘 모르고 치솟는 물가와 경제적 문제 때문에 서민들 살기가 어려운 요즘, 정말 이런 뉴스들을 접하다 보면 상대적 박탈감에 속에서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아마 누구나 한 번씩은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한다.

사건들의 진위는 차치하더라도 듣기에도 거북하고 불편한 이런 진실들이 마치 그동안 우리의 살갗 밑에 숨어, 언젠가 터질 날만을 기다리던 종기처럼 갑작스럽게 우리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런 우리 사회의 병폐들이 차라리 지금처럼 곪아 터져버려 만천하에 알려지는 편이 숨겨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을까 하고 자위(自慰)를 해보지만, 혹시나 했던 일들이 눈앞에 벌어지니 역시나 입맛이 씁쓸해질 뿐이다.

이러한 기사들을 너도나도 대서특필해 다루고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하고 있을 때, 아무도 볼 것 같지 않은 신문 한구석에 어느 농부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지난 13일 충남 태안군 안면읍에서 평생 농사를 천직으로 삼고 살아온 68세의 농부는 가족과 일생 자신의 터전이었던 농토를 두고 스스로 이승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는 이번 달 초, 전국을 강타한 태풍 ‘곤파스’로 고추 농사를 망치고 우사(牛舍)의 지붕이 날아가 버리는 피해를 보았고, 그 피해를 채 복구도 하기 전에 며칠 후 몰려온 폭우로 인해 집 뒤의 토사가 무너져 내려 배수로를 덮쳐버리고 말았다.

'나이를 먹어 태풍에 쓰러진 고춧대를 더는 치우지도 못하겠다'라고 가족에게 말했던 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고 한다. 충남 태안은 몇 해 전 기름유출 사건으로 심한 피해를 보던 지역이다. 오염으로 인해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여기고 살아오던 어부들에게 피눈물을 흩뿌리게 했던 그곳이 이번엔 여름 내내 계속된 폭우와 태풍의 공격에 농부들마저 직격탄을 맞았다. 촌부(村夫)는 그 직격탄에 일 년 내내 애를 쓰면서 키워낸 고추가 쓰러져 넘어가는 것을 혼자서 세울 수밖에 없었다. 함께 농사를 도우며 살아오던 이웃들도 마찬가지 처지였기 때문이다. 소도 키우며 논과 고추밭 등 어느 정도 규모의 농사를 짓고 살던 그로서도 도저히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적 정신적 한계는 그를 절망으로 몰고 갔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에서도 손꼽는 IT강국이라 자부하며, 공업 선진국의 대열에서 외국과의 수출입에 의존하며 살아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가 원래 농업국가라는 사실이 점점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우리나라는 강력한 제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수출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뤄온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보릿고개를 넘기며 고생하던 시절, ‘수출역군’의 이름 아래 얼마나 빛나는 경제성장을 이루었던가? 외국에서도 우리나라의 경제발전과정을 연구하고 배워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세월이 지나고 나니 이렇듯 우리가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생길 수밖에 없는 일들의 결과가 비극이 되어 일어나고 있다.

사실 그렇지 아니한가? 이제 농촌에는 농사를 지을 젊은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자식들을 도시로 내보내거나 이미 대부분 농민이 오래전 농촌을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전국의 농지율도 심하게 감소했다. 농수산물 수입개방 이후, 농어촌 종사자들은 갈 곳을 잃었다. 아니, 천직과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떠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농사를 짓는 것으로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은 사람들로는 제대로 농사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추수철이 되면, 일손이 부족해서 애를 태운다. 거둘 사람이 없어 농작물 그대로 밭을 갈아엎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녹색성장을 외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나라 곳곳에선 강을 정비하며 녹색성장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국민과 단체들도 저마다 목소리로 녹색혁명과 환경보호를 위해 외치고 있지만, 진정 녹색을 유지해야 하는 우리의 농촌이 죽어가고 있다. 진심으로 우리의 땅을 녹색으로 물들이려 한다면, 우선 우리의 삶의 근본인 농촌을 살려내야 한다.

1차 산업의 기반형성이 그 나라가 얼마나 건강한 나라인지 알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이는 누구보다도 우선적으로 정부가 앞장서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또한 제도적으로 농촌에 삶의 희망을 심어줘야 한다.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살고 그곳에서 발전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정부와 민간 기업이 힘을 합쳐야 한다. 절망으로 죽어가는 희망의 밭에 푸른 새싹을 틔워줘야 한다. 희망 없는 미래는 인간의 삶에서나 환경에서나 양쪽 모두 절망을 불러오며, 그 끝엔 죽음을 만날 수밖에 없다.

이번 추석연휴를 시작하며 103년 만에 유례없는 폭우가 수도권을 덮쳤다. 도시권의 피해도 컸지만, 벼농사로 유명한 경기도 이천과 여주 지역은 지난번 태풍 곤파스로 쓰러진 벼들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이번엔 물폭탄 세례로 물에 잠겨버렸다. 농민들은 추석연휴에 일손마저 부족해 물에 잠긴 벼들을 일으켜 세워보지도 못하고 절망에 잠겨 하늘을 원망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들을 누가 돌아봐 줄 것인가?

미래에는 농업 선진국만이 진정한 강국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녹색산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중심에 서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모든 거의 중심에 인간과 생명이 위치하여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천재(天災)는 막을 수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인재(人災)는 막을 수 있다. 태풍이나 가뭄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도 절망에 빠진 농부들과 우리의 농촌을 살리는 길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은 항상 푸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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