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말살정책에 항거 '우리말본 초고' 저술
한글지 창간등 '국어학자·운동가'로 한평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외솔 최현배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조선민족 갱생(更生)의 도를 동아일보에 연재해 독립 방안을 모색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른 국어학자이며 국어교육자, 국어 운동가였다.

선생은 1894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1910년 관립한성고등학교에 입학한 선생은 박동 보성학교 국어강습원에서 주시경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 애국사상을 정립하는 한편, 평생 국어 연구와 실천에 매진하는 계기를 맞게 됐다. 1915년 관립한성고등학교(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관비 유학으로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연구과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등 학자로서의 기틀을 갖춰 나갔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이듬해 8월‘조선교육령'을 공포해 일본어 교과서를 사용하고 평상시에도 일본어의 사용을 강제하는 등 이른바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일본 유학 중 교육학을 접하면서 민족 계몽의 필요성을 깨달은 선생은 1920년에 사립동래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부임해 우리말을 가르치며 연구했고 국어의 문법 체계를 세울 목적으로 우리말본의 초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일제의‘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적극적 항거였다. 

1926년 동아일보에 조선민족 갱생의 도(66회 연재)를 발표해 민족이 다시 살아나기 위한 실천적 이상주의를 고취하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해 우리말본의 저술을 계속해 나갔다. 또한, 같은 해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의 회원이 되어 ‘한글’지를 창간하고,‘한글날’ 제정에 참여했으며, 이후 1929년 조선어 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 및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33년까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이뤄 내기 위해 노력했고, 1937년 우리말본을 출판하는 등 민족 언어를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1938년 선생은 이른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경찰에 검거돼 옥고를 치루고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에서 강제 퇴직했다. 이렇게 실직해 있는 중에도 선생은 한글을 역사적·이론적으로 연구한 '한글갈'을 짓기 시작해 1942년 출판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고, 같은 해 10월 다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됐다. 이 사건으로 동지인 이윤재는 옥중 순국했으며 선생은 해방이 될 때까지 옥고를 치러야 했다. 

선생은 해방 후 미군정청 편수국장, 대한민국 수립 후 문교부 편수국장을 지냈으며 이후 연세대학교 교수로 연구와 교육활동을 계속하다 1970년 작고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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