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뉴스에서 많이 낯익은 분의 슬픈 소식에 깜짝 놀랐다. 더군다나 남편과 함께 생을 정리했다는 보도에 더욱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지병으로 오랫동안 참기 어려운 고통을 안고 살아왔다는 사정 얘기를 들으니 행복전도사로 널리 알려졌던 고인이 감당해야만 했을 엄청난 스트레스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더위가 시작되던 지난 5월 말 4대강 사업의 반대를 몸으로 보여주고자 소신공양을 하신 문수스님은 우리에게 많은 고민과 숙제를 남겨 주셨다. 무엇보다 종교인으로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일반인뿐만 아니라 불교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이분들의 행동이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는 행동이었음에도 우리 가슴의 아쉬움은 여전히 가셔지지가 않고 있다. 그것은 불교 교리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불교의 많은 계율 가운데 첫 번째 항목의 계율은 바로 ‘살생하지 마라(불살생)’이다. 그리고 수많은 계율이 사실은 불살생이라는 계율을 확실히 하기 위해 제정됐다. 예를 들면 풀밭에 오줌을 누지 말라고 한다든지 함부로 땅을 파지 말라고 하는 계율은 모두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를 생명체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요즈음 줄기세포 연구 분야에서 정자와 난자가 탁태되고 몇 주부터 인간으로 보아야 하는가가 아주 예민한 생명과학의 윤리 문제로 대두됐다. 그러나 불교교리에 의하면 정자와 난자가 만나 탁태된 그 순간부터 하나의 생명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며, 그렇게 생명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불교가 어떻게 자살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경전에 등장하는 소신공양 이야기는 신심과 철저한 수행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법화경’이라는 경전에 자신의 팔을 태우는 부처님 제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은 믿음과 수행의 확고함을 나타내려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해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비와 사랑을 주창하는 종교와는 어울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신라시대 화랑의 ‘세속오계’에 등장하는 산 것을 죽일 때 가려서 죽이라는 ‘살생유택’이라는 계율이라든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에 승병으로 전쟁에 참가해 왜병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많은 승병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하는 원리주의는 애초에 반대하셨다.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허락해 오히려 수행하는데 부담을 주는 계율이 되지 않도록 배려하셨던 것이다. 예를 들면 초기불교에서의 계율에 의하면 스님들은 마을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에 머물며 식사는 신자들에게 얻어서 해결하는 걸식으로 생활하게 돼 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때로는 스님들이 초대받은 마을에 들어가 신자들 집에 머물 수도 있고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받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셨다. 그것은 어찌 보면 융통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가끔 권력과 재산 앞에 비굴해져서 문제지만, 원래 모두에게 예외 없이 엄격해야 할 법률에도 피치 못할 사정을 인정하는 경우가 있고 그럴 경우 결과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예를 들면 ‘과실’이라고 해 의도하지 않은 실수로 벌어지는 사건의 경우나 ‘정당방위’라고 해 자신과 가족을 지키고자 어쩔 수 없이 벌인 사건일 경우 정상참작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리 종교적 삶을 살겠다고 서약했을지라도 당장 가족의 목숨이 위태로운데 가만히 있는 것은 가족에 대한 도리라는 측면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물론 대승불교에서는 ‘인욕바라밀’이라고 해 ‘참는 것’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아주 중요한 수행법으로 강조하고 있지만, 내가 이해한 부처님의 의도는 보통 사람의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보편타당한 행위야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시하셨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인간의 존엄사(안락사) 문제를 고민하게 했던 큰 뉴스가 있었다. 그 사건은 우리에게 더 이상의 치료방법이 없는 환자의 생명유지 장치를 제거하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있을까라는 화두를 던져 주었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으로 법적으로 어느 정도 존엄사를 허용하는 추세로 보이지만 그 기준은 아주 엄격해야 할 것이다. 존엄사가 우리의 상식에 통하는 보편타당한 행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고통스러웠던 마지막을 지켜보며 잠시 잠깐 존엄사를 떠올렸던 나이기에, 아직도 수행이 많이 모자라서인지 저 가슴 깊이에서는 인위적인 생명 거둠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대에 100퍼센트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해 부끄럽다. 더욱 공부하고 수행해 모두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자신 있게 강조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