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대한독립애국단을 결성하고, 단장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신현구(1882.12.8 ~ 1930.7.13)선생을 신묘년 첫 번째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1882년 12월 8일 충남 논산 부적면 안천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고향인 논선에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전도사업을 벌이던 선생은 1906년경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즈를 만나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활동했고, 민족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1915년 서울로 올라와 이화학당 부속여학교 교사로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1919년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선생은 이에 적극 참여해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했다. 이후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년 5월 그 추진체로서 대한독립애국단을 결성했다. 대한독립애국단은 단장인 선생과 함께 재무총장 김순호, 김상덕 등을 중심으로 조직됐으며,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 지단을 설치했다.

국외에 설립된 임시정부는 국내의 재정적 후원 및 지지가 절실히 필요해 동단은 결성 초기부터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결돼 임시정부 지원단체로서의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대한독립애국단 단장으로서 임시정부 독립운동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 조달,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망인 연통제의 역할을 했다.

선생은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대동단,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등의 단체와 교류를 통한 결속을 강화해 제2의 3.1독립운동인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추진했다. 그러나 1919년 11월 예정일을 앞두고 대동단의 조직이 일제에 발각돼 실패했으며 선생은 11월 20일 일경에 체포됐다. 이후 대한독립애국단의 전모가 드러나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만기출옥 후에도 신간회 경성지회 서기로 있으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했고, 잡지 《심경》에 항일사항을 고취하는 글을 실었다가 다시 일경에 체포돼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았고, 이후 모진 고문 여독으로 1930년 7월 13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자료제공=수원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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