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 죽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

자로가 다시 물었다.

“ 귀신 섬기는 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

“ 사람도 다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느냐? ”  - 공자와 자로의 대화 中

공자. 소크라테스, 부처, 그리고 예수와 더불어 4대 성인이라고 불리 우는 사람이다.

   
혼란스러웠던 춘추 전국 시대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노자, 묵자, 한비자 등의 현자들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한 사상을 들고 등장했었다.

그 많은 사상과 현자들 중에서 현재 우리가 가장 가깝게 기억하는 것은 공자와 그의 사상 , 유가이다.

공자의 사상을 단 하나의 음절로 표현하자면 ‘ 인(仁) ’ 이요, 두 음절로 표현하자면 ‘ 사람 ’ 이다.

공자가 강조한 것은 사람다움의 실천과 정치다운 정치였다. 즉, 공자의 사상은 깊은 인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성과 본질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는 데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한비자가 창시하고 상앙에 의해서 발전된 법가 사상은 강력한 통치 방법의 하나로 사용된다.

법가는 절대적인 질서, 규율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자로 잰 듯 정리된 질서가 잠시나마 존재할 수는 있겠으나, 법가 사상의 허점은 바로 그 ‘ 잠시나마 ’ 라는 것이다. 

스파르타식의 질서와 규율은 장기적으로 멀리 내다보는 눈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지나치게 가혹한 질서는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궐기 또는 봉기를 막을 수 없다.

겸애설을 주장하며 ‘ 사랑 ’을 내세웠던 묵가 역시 훌륭한 사상임은 틀림없다. 신분제와 전제정치의 폐지는 매우 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실제로 이 두 가지 사회적 체제가 사라진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시민혁명 이후였기 때문임을 고려한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모든 조건을 불문하여 사람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고, 약한 사람을 먼저 돌보고 사랑했다는 점은 능력에 따라 차별 없이 사람을 등용하는 춘추 전국시대의 열풍보다 한층 ‘ 진보 ’ 된 사상이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 복지 사회 ’ 개념과 연결지을 수 있는 것으로서 진정으로 풍족한 사회는 약자가 보호받는 사회라는 사상을 이미 생각해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묵가 사상은 ‘ 춘추 전국 시대 ’ 에 적용하기에는 너무도 부드럽고 진보적이었다. 다른 사상에 비해서 한층 발전된 개념을 창시한 것은 사실이나, 묵자의 한없는 사랑은 어지러운 시대의 질서를 잡기에는 상당히 연약했다.

그렇다면 다시 공자와 유가 사상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유가는 절대적이고 지나치게 강력한 철권을 내세우지 않았으나 군신, 부자 등 상하간에 일정한 질서가 있음을 내세움으로서 어지러운 시대를 통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사람 사이의 차별과 등급이 있음을 주장했다고 보여질 수 있겠으나 ‘ 도 ’를 지킨 ‘ 질서다운 질서 ’ 는 통합에 있어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이것을 넓게 펴면 ‘ 정치다운 정치 ’ 가 된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행동하며 ‘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규율 ’ 이 아닌 ‘ 사람 ’ 중심의 규율은 변증법적 성격으로 설명될 수도 있으며 진정으로 본질적이고 이성적인 질서를 만들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본질, 이성은 ‘ ~ 다운 ’ 것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공자가 주장한 인은 여태껏 내가 설명했던 유가 사상의 강점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유가의 ‘ 인 ’ 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상을 거시적으로 넓게 봐야 한다. 이성, 본질, 인본주의를 바탕에 두고 묵묵히 실천해나가는 것을 주장하는 공자의 유가 사상은 이런 연유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자는 생전에 빛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것은 어지러운 춘추 전국 시대를 ‘ 빨리 ’ 바로잡으려는 마음에 바로 눈앞의 결과만을 기대했던 각 제후국들의 태도에서 연유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본질적이며 이성적인 것은 ‘ 장기적 ’ 으로 먼 미래를 내다보고 거시적인 시각을 갖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결국 공자의 사상은 되살아나 현대까지 많은 이들을 사로잡았다. 제후들은 인재를 놓친 것이다.

혼란스러운 사회상 때문에 다채롭고 훌륭한 사상을 가진 선비들이 등장했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사상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우는데 기틀을 잡아주기도 했고 각 국의 제후들은 현자를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 제후들이 그토록 현자를 원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또 제후들이 놓쳐버린 현자들 또한 얼마나 많았을까? 공자가 그중의 하나다.

지금의 우리 현실을 춘추전국시대에 굳이 비교할 수는 없지만 혼란스럽다는 사실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재의 우리는 사회의 인재를 잘 발굴해내고 있는 것일까? 인재를 보는 기준을 획일화시키는 바람에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의 인재를 알아보는 일이, 그리고 그보다 먼저 키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있는 것일까? 등용된 인재를 얼마나 잘 보호하고 있는가?

미래의 현자들을 위해서 얼마나 합리적인 교육을 행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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