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제가 초상(청나라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 초상)
왕이 만든 팔달문 시장은 누구의 기획일까? 당연히 국왕 정조의 기획이었다. 정조가 새로운 조선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새로운 형태의 유통과 무역을 담당할 수 있는 상인층의 형성이었고, 그러한 상인들이 상설 시장을 형성하여 조선의 상업을 주도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로 인하여 안성시장과 전주시장보다 더 큰 시장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상업관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은 다름 아닌 박제가였다.

박제가 하면 흔히 떠오르는 것은 바로 ‘북학의(北學議)’의 저자인 실학자에 대한 이미지이다. 당연하다. 그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워서 조선의 발전을 요구한 이용후생 학파의 대명사이다. 연암 박지원, 청장관 이덕무, 그리고 얼마 전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야뇌 백동수와 교류를 하며 북학파의 일원이 된 그는 정조 즉위 후 연경에 사신단의 일원으로 다년 온 후 북학에 대한 생각을 굳힌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중국을 추종하는 사대적 관점의 인물은 절대 아니다. 그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과 별도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북벌론자이기도 하였다. 중국의 문화를 익혀 그 기반을 중국에 복수하여야 한다는 논리는 당대 사대부들 사이에서 보편적인 것이었지만 박제가는 특히 그러한 생각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다니면서 청나라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전략을 세웠던 인물이다. 국왕이 자신에게 군사를 준다면 반드시 요동벌을 쓸어버려 잃어버린 고토와 청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 그가 청의 상업행위를 본받아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자고 주장하였으니 이보다 더 실용적인 인물이 어디 있겠는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던 박제가를 등용한 사람은 다름이 아닌 정조였다. 그는 자신의 싱크탱크인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박제가와 이덕무 등의 서얼들을 검서관(檢書官)을 임명하여 학문육성의 기반이 되게 하였다. 이들은 규장각에 있는 수많은 서적을 열람하고 그 내용을 분석하여 정조 개혁정책의 밑거름이 되게 하였다. 정조의 수많은 개혁정책은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규장각 검서관들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결코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박제가가 정조에게 준 가장 큰 영향은 바로 양반의 상인론이었을 것이다. 정조가 재위하던 조선시대의 기후는 참으로 안 좋았다. 재위 24년 중 20년이 가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있었다. 영조 재위 52년 중 40년이 금주령의 시대였고, 정조 재위 내내 기후가 안 좋았으니 백성이 먹고살기가 힘들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양반들은 실용적인 생활을 하지 않고 오로지 낡은 학문에 매달려 일을 하지 않았다. 무위도식(無爲徒食)이 그들의 일이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절대로 발전할 수 없다. 그러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는 망하는 나라이지 흥하는 나라가 아닌 것이다. 정조는 이들을 어떻게 하면 실용적인 일을 하게 하여 조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였다.

그리하여 그는 1786년(정조 10)에 조선의 모든 관리에게 국가를 위한 새로운 정책을 과감 없이 올려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국왕에 대한 처절한 비판도 모두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정조다운 발상이었다. 박제가는 정조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규장각에서 늘 가까이 있으면서 국왕과 토론을 나누던 그였기에 정조가 얼마나 새로운 의견에 목말라하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 역시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그것이 바로 ‘병오소회(丙午所懷)’이다. 병오년이라는 것은 바로 1786년을 이름이다.

1786년 1월 22일 조정의 아침조회에서 전설서(典設暑) 별제(別提)의 직책에 있던 박제가는 정조에게 파격적인 정책구상을 제시하였다. 바로 중국과의 통상과 양반상인론이었다. 박제가는 그렇게 이야기하였다. “현재 국가의 가장 큰 폐단은 바로 가난이옵니다. 그렇다면 가난을 어떻게 하면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중국과 통상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박제가는 중국과 통상을 중요시 여겼고, 중국 통상 이후 주변의 여러 나라와도 통상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서양의 선교사들까지 조선으로 입국시켜 그들의 지식을 배워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도 하였다. 박제가는 이러한 통상을 누가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제안도 하였다. “신은 수륙의 교통요지에서 장사하고 무역하는 일을 사족(士族)에게 허락하여 입적할 것을 요청합니다.” 즉 양반들이 장사하고 중국과의 통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재들이 마냥 과거시험에 몰두하여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경제적 안정과 백성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양반들이 상인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정조는 박제가의 건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규장각에서 늘 박제가와의 대화 속에서 조선을 위한 이용후생의 방도를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789년 7월 수원 부읍치를 팔달산 일대로 이전하고 새로운 수원시전을 형성하면서 정조는 박제가의 양반상인론을 현실화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시장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수원의 성내외 시장은 정조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조선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성장하였다.

▲ 김준혁 박사
글=김준혁 박사(경희대학교 문학박사 교수·수원화성박물관 학예실장)

기획=(주)브랜드스토리, 팔달문상인회, 수원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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