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의 해가 밝았다. 2012년은 아마추어스포츠 꽃의 해이다. 희망의 해다. 런던 올림픽이 열리는 해이기 때문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우리는 올림픽4강의 자리에 올라서 스포츠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프로스포츠의 활기로 아마추어 스포츠가 크게 빛을 잃으면서 우리는 매년 올림픽에서 세계 10위권을 맴도는 것이다. 이제 올해 런던올림픽에서 최소 금메달 13개 은 10개 동 8개(대한체육회 목표)로 10위권을 훨씬 뛰어넘어 5위권을 바라보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런던올림픽 하면 우리는 1948년의 런던올림픽 때 처음으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참가한 경험이 있는 대회이기 때문에 더욱 뜻이 깊은 것이다. 그리고 48년 런던올림픽하면 떠오르는 것이 이상백 박사이다. 우리 스포츠역사상 첫 올림픽 참가의 첫 선수단장이기도 하지만 이상백 박사의 개인적인 스포츠맨의 권위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 대회에 참가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에서 그의 권위를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이상백 박사는 일제 시 일본 와세다대학시절 농구선수생활을 했다. 그는 주장으로 와세다대학 선수들을 인솔하고 미국 원정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미국과 일본대학의 농구경기수준은 대결의 대상도 아니다. 그러나 이상백 박사는 미국의 대학스포츠 활성화의 시스템을 연구해 왔다. 종목마다 대학경기연맹이 각 대학의 종목별 대회를 개최하며 대학스포츠가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대학경기연맹연합회가 대학종합스포츠대회를 매년 개최하는 것도 조사했다. 종목마다 대학연맹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목별 경기연맹 산하의 실업팀 연맹, 대학연맹 그리고 중고학생의 연맹이 있고 이 모든 경기연맹이 연합해 조직 한 것이 미국체육회이고 올림픽 때 참가하는 조직은 미국 올림픽위원회라는 것도 알아냈다.

그는 일본에서 우선 대학농구연맹을 조직하고 종목마다 대학연맹을 조직하게 하고 뒤이어 같은 종목마다 경기연맹을 조직하고 일본체육회에 모든 경기연맹을 가맹하게 했다. 그리고 올림픽위원회를 조직 국제 올림픽 위원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의 뛰어난 스포츠단체의 구성은 일본이 체육회를 조직하면서 그를 전무이사로 추대했다.

그의 첫번째 과업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의 참가였다. 이때 마라톤의 손기정, 남승룡, 김은배, 농구의 이성구, 장이진, 축구의 김용식 등을 대표선수로 발탁 구성하고 그는 올림픽 선수단 총무로 활약했다. 손기정이 우승하고 남승룡이 3위를 차지하게 한 업적을 그의 공로로 돌려도 좋은 것이다. 그때의 활약으로 그는 IOC에서 일본 도쿄올림픽유치에 성공한다. 1944년 일본이 올림픽주최권을 획득한 것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으로 그 올림픽이 무산됐다. 2차대전의 종식과 함께 1948년 런던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것이다.

올림픽은 7월에 개최됐었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는 5월 10일 총 선거를 실시하고 국회를 구성하고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했으나 정부의 출범은 8월 15일로 정해놓고 있었다. 아직 정부의 출범이나 대한민국의 건국이 출범되지 않은 상태에서 7월에 올림픽이 개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백은 재빨리 대한 올림픽위원회(KOC)를 조직하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해 놓고 있었다. 올림픽은 국가의 정치체제보다 그 국가의 올림픽위원회(NOC)에 가입하면 올림픽참가권이 획득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상백 박사의 활약으로 올림픽 참가가 가능해 진 것이다.

우리나라는 첫 런던올림픽에서 복싱에서 한수안 선수가 역도에서 김성집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올렸다. 한수안 선수는 복싱연맹임원으로 활약하면서 한국 복싱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올리는 공헌을 했고 김성집 선수는 역도 연맹만이 아니라 그 뒤에 대한체육회 사무총장 태능선수촌장 그리고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 우리나라 아마추어스포츠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한 바 됐다.

그리고 64년 만인 2012년 올해 7월에 다시 런던 올림픽이 열리게 된 것이다. 올해 영국의 런던 올림픽은 1908년, 1948년에 이어 개최되는 것이다. 올해에 출전할 선수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태어난 선수들이 주류를 이루어지게 되어 기대를 모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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