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주역에서 통학하던 조선인 여학생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일본인 남학생과 이를 응징하는 조선 남학생

애비 놈들 남의 나라 삼키더니
그 자식들 통학하며
싸가지 없이
조선인 여학생 댕기를 잡아 당겼것다

아야야야 아야야야
그 광경보다 못해 조선 남학생들
왜놈 학생 멱살 잡고 한 대 날렸것다

아무렴 가만있을 수 없지

땅 뺏기고 말 뺏기고 자유 뺏기길 10년째
나주 광주 목포 서울 평양 학생들 분노 소리
땅을 가를 때

어린 학생 잡아다가 고문하던
왜놈 순사들
머리채 잡아끈 후쿠다(福田修三)는 놔두고
힘없는 나주의 딸 이광춘만
머리끄댕이 잡히고도 퇴학당했다지
 
제 자식 혼 안내고
남의 자식만 혼내는 것
조선에선 후레자식이라 하지

후레자식들!
후레자식들!


●이광춘 (李光春, 1914.9.8~2010. 4.12) 
 
<통학길의 조선 여학생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긴 사건>

“그때는 개찰구 쪽으로 먼저 나가는 쪽이 힘이 세다고 생각하여 한일 간에 서로 먼저 나가려고 했어요. 우리 한국학생들 수는 적었지만 더 야물었지요. 기차 속에서 즈그들 수가 더 많은 게 까불까불해도 한국학생들이 눈을 크게 뜨면 야코가 팩 죽어 말도 못하지라우.”

이광춘 여사는 잡지 <예향, 1984년 11월호, 당시 71살>에서 그렇게 말했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 통학열차에서 내려 개찰구를 빠져나가던 한국인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일본인 남학생이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이에 격분한 남학생들이 뛰어들어 한·일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3·1만세운동, 6·10 만세운동과 함께 일본 강점기 때 3대 민족운동으로 꼽히는 광주학생운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날 일본인 남학생에게 희롱당한 댕기머리 소녀들은 박기옥, 이광춘, 암성금자였는데 당시 이광춘 여사는 광주여고보(전남여고 전신) 5학년으로 ‘소녀회’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11월 13일 시험 날을 맞았다. 11월 3일 사건으로 형무소에 구금된 급우들이 있어 이날 백지시험 동맹을 하기로 약속했으나 시험 당일 서로 눈치만 보는 급우들에게 이광춘 여사는 ‘어저께 헌 약속 어떻게 된 거냐? 친구들은 감옥에 있는디 우리만 시험을 볼 것이냐.”라고 하면서 시험지를 놔두고 교실을 뛰쳐나오자 이에 동조한 친구들이 삽시간에 뛰쳐나오고 전교생이 이에 동조해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이를 계기로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은 거족적 학생운동으로 번졌는데 전국 194개 학교에서 5만 4,000여 명이 민족 차별과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를 요구했고 만주·중국·일본의 동포도 호응했다. 이광춘 여사는 이 사건으로 퇴학 처리되었으며 당시 고등계 형사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했다. 광주학생운동의 마지막 증언자 이광춘 여사는 평생 5남 3녀의 자녀들에게 일제의 민족차별에 맞서 불굴의 정신을 잃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술회했다. 나주의 댕기머리 소녀 이광춘 애국지사는 2010년 4월 12일 96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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