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옥중의 아들아
목숨이 경각인 아들아

칼이든 총이든 당당히 받아라

이 어미 밤새
네 수의 지으며
결코 울지 않았다

사나이 세상에 태어나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
그보다 더한 영광 없을 지어니
 
비굴치 말고
당당히
왜놈 순사들 호령하며 생을 마감하라

하늘님 거기 계셔
내 아들 거두고
이 늙은 에미 뒤쫓는 날

빛 찾은 조국의
푸른 하늘
푸른 새 되어
다시 만나자

아들아
옥중의 아들아
목숨이 경각인 아들아

아!
나의 사랑하는 아들 중근아.

▲ 사형을 앞둔 아들의 수의를 만드는 어머니의 심정은 천길만길 찢어진다.

● 조 마리아(본명 조성녀, 미상 ~ 1927.7.15)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길 원하지 아니한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刑)이니 결코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들 안중근에게 옥중 편지를 보내는 어미의 심정은 담담했다. 아들의 죽음을 앞둔 어미의 심정이 어찌 흔들리지 않았으랴! 그러나 조 마리아는 결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안중근은 그런 어머니의 꺾이지 않는 정신을 배웠던 것이다. 평소 백범 김구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와 우애 좋게 지내던 조 마리아 여사는 곽 여사가 김구에게 엄하게 대했던데 견주어 아들 안중근에게 자애로운 어머니로 알려졌다. 그러한 어머니가 자식의 마지막 가는 길에서는 매우 단호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안중근 어머니 조 마리아는 1907년 5월 평안남도 삼화항(三和港) 은금폐 지부인회를 통해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내고 1926년 7월 19일에 조직된 상해재류동포정부경제후원회(上海在留同胞政府經濟後援會) 위원을 역임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창립총회에서 안창호, 조상섭 등과 함께 정위원(正委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함으로써 안중근의 어머니로서 뿐만 아니라 남자 못지않은 독립운동에 뛰어든 독립투사였다.
 
1909년 3월 26일 10시 4분 사형 집행 날 아들에게 입힐 하얀 명주 바지저고리를 만들어 여순감옥으로 손수 보냈던 어미의 타들어 가는 속내를 그 누가 알랴! 아들 처형 뒤에도 조 마리아는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뒷바라지를 하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이등박문은 수많은 한인을 살해하였는데 안중근이가 이등박문 1인을 죽인 것이 무슨 죄요, 일본재판소가 각국 변호사를 불납(不納)한 것은 무지가 극함이다” <대한매일신보, 1910.3.2>. 연일 신문들이 안중근의 죽음을 애도할 때 조 마리아 여사는 슬픔을 삭이고 묵묵히 독립운동을 실천하다 삶을 마쳤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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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라 부르지 마라. 안중근은 대한의용군사령 자격으로 이등박문을 처단했으니 안중근 장군이다.”

안중근(1879.9.2~1910.3.26)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아버지 진사 안태훈(泰勳, 泰勛)과 어머니 조 마리아 사이의 3남 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응칠(應七)로 불렸고 나라밖 생활 중에도 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등박문을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에 도착,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려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이 뛰어나가 권총을 발사, 이등박문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사건 이후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 라고 자신을 밝힌 다음 거사 동기를 ‘이등박문이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는데 안중근은 그때마다 일반살인 피고로 취급하지 말고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국내외에서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旅順)에 도착하였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郞)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

재판과정에서의 그의 태도와 정연하고 당당한 진술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내심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선변호인 미즈노는 검찰관에 대한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하여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언도공판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는데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정근(定根)·공근(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안중근은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 형장에서 서른한 살의 아까운 나이로 순국하였다. 그의 의거는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으며 애국심으로 응집된 행동이었다. 그의 의로운 죽음은 영원히 민족의 자존심이요, 불굴의 혼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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